고려 시대에도 입시 열풍이?
고려 시대에도 입시 열풍이?
  • 김현선 시민기자
  • 승인 2011.02.10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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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 삼수 흔해...신동 이규보도 4수생
[북데일리] 그동안 교육 당국은 학생들의 부담을 줄여준다는 이유로 국사를 선택 과목으로 돌려 홀대해 왔다. 그러나 올 초 2009 개정 교육과정에서 특정 학년은 “국사를 안 배워도 된다.”는 내용이 도마 위에 오르자, 정부는 부랴부랴 내년부터 한국사를 고교에서 채택하기로 했다.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사는 우리 조상이 지난한 과거를 살아온 경험의 총체이며,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현재 우리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함이다. 세계화 시대일수록 국사 교육을 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계란 드넓은 무대에 홀로 당당히 설 수 있는 자신감은 내가 누구인지 바로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

<문화로 만나는 우리 역사 2권>(청년사.2010)은 우리 문화의 원형을 이룬 고려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를 다루었다. 그동안 조선에 가려져 소홀히 취급되어 온 고려시대를 집중적으로 해부하고 있다. 의식주를 비롯하여 정치와 제도, 국가 간의 교역과 전쟁 등 외교 문제까지 고려 사회의 모든 것을 문화사적 측면에서 풀어냈다.

다양한 자료와 전문가의 해설이 내용의 깊이를 더 한다. 특히 각 장 뒤에 ‘쌩쌩 통신’ 란을 두어 주요 사건의 관련 정보를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읽는 이의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

고려는 918년에 건국되어 조선 왕조가 성립될 때까지 약 500년이라는 오랜 기간 이어졌던 옛 우리나라이다. 또한, 실질적으로 우리나라를 통일한 최초의 통일 왕조이기도 하다. 고려는 문화적으로나 이념적으로 조선과는 많은 것이 달랐다. 조선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면, 고려는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힘이 느껴지는 나라였다. 타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자국 문화에 대한 긍지와 자신감 또한 높았다.

고려 시대 사람들이 꿈꾸는 가장 좋은 직업은 관료였다. 관료가 되면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과 집안까지 확실한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관료가 되기 위해선 조상의 음덕인 음서 제도를 통해 관직을 받는 것과 과거에 합격하여 능력을 인정받는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몇몇 중요한 관직은 과거에 합격한 사람만이 관료로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과거 시험 역시 쉽지 않았다. 나라에서 과거를 치를 때마다 전국의 수재들이 몰려들어 치열한 경쟁을 했다. 당시에는 시험에서 떨어지는 사람들도 흔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고려 시대에도 지금의 입시 열풍 못지않게 과거 열풍이 만만치 않았다.

고구려 건국 신화 <동명왕편>을 지었고, 어릴 때부터 글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란 소문이 자자한 이규보도 과거 1차 시험인 국자감시에 도전하여 세 번이나 떨어지고 네 번째 겨우 합격할 정도였다.

눈길을 끄는 것은 여성의 권리와 지위에 관한 내용이다. 조선이 여성의 권리와 지위를 억압하는 체제였다면, 고려에서는 아들딸 차별 없이 재산을 물려받고 의무를 졌다. 고려는 여성도 호주가 될 수 있는 나라였다. 그러므로 결혼을 해도 남자 쪽 사람들 못지않게 여자 쪽 사람들도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이를 바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제도가 오복제도와 음서 제도이다.

오복제도는 친척이 죽었을 때 상복을 입는 친족의 범위와 상복의 종류를 정한 제도이다. 고려에서는 상복을 입을 때 이웃 나라 중국보다 처가나 외가를 중요시하였다. 외할아버지가 죽으면 중국에서는 5개월 동안 상복을 입었다. 하지만 고려에서는 친할아버지와 똑같이 1년을 입었다. 장인이 죽었을 때도 고려에서는 5개월 동안 상복을 입었다. 중국의 3개월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처가와 외가를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음서 제도는 조상의 음덕으로 자손이 벼슬에 오를 수 있는 고려 정부의 관리 등용 방식이다. 이 제도를 통해 고위 관리의 아들과 자손뿐만 아니라, 사위나 외손자에까지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이는 여성이 족보에 기록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고려 시대에는 아들 딸 구별 없이 태어난 순서대로 족보에 기록했다. 예를 들어 죽은 이의 일생과 가계를 적어 함께 묻는 묘지명에 무조건 ‘아들 몇, 딸 몇’을 적지 않고, 딸이 먼저 태어났으면 ‘딸 몇, 아들 몇’의 순서로 기록했다.

어느 나라든 나라가 발전해 온 배경에는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가 있다. 문화를 알면 역사를 보는 눈도 달라진다. 연도와 사건을 외우는 것이 역사 공부의 전부는 아니다. 당시 살았던 사람들의 과거의 흔적을 느끼고 이해하는 것도 역사를 공부하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고려의 개방적이면서도 주체적인 문화 수용은 글로벌 시대를 사는 후손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외국 문화를 받아들이되, 우리의 참모습과 주체성을 잃지 않은 것. 이것이야말로 지구촌에서 길을 잃지 않는 방법이며, 역사를 배우는 이유이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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