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찌르는 '인디언 추장들 명연설'
가슴 찌르는 '인디언 추장들 명연설'
  • 김태우 시민기자
  • 승인 2008.10.24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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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김영사. 2003)는 백인이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한 때부터 1900년대까지 행해졌던 인디언 추장들의 명연설을 모은 책이다.

책은 총 41개의 연설과 인디언의 명언들로 구성되어있다. 거기에 작가 류시화가 연설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인디언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는 설명을 곁들이고 있다. 이 책을 묶기 위해 그는 15년간 자료를 수집, 정리했다고 한다.

인류의 역사 속엔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약소민족을 무자비하게 짓밟은 백인들의 횡포가 있었다. 백인들은 땅을 빼앗는 죄악뿐만 아니라 약소민족의 문화를 열등하다고 세뇌시키는 잘못도 저질렀다. 백인 지도자들은 약소민족을 지배하기 위해 백인사회에 집단적 광기를 주입시켰다. 그들이 조작한 '약소민족, 인디언에 대한 오해'를 이 책은 하나씩 풀어주고 있다.

인디언들은 자연이 파괴되기 이전부터 환경주의자 였고, 민주주의를 뛰어넘어 권력 자체가 생성되는 것을 차단하는 정치적 제도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소유와 욕망이 집착과 살인의 원인임을 깨닫고 자연과 더불어 명상으로 그들 스스로를 다스리려고 한 선한 민족이었다.

과연 누가 학살자인가.  인디언이라고 하면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오를까. 혹시 헐리우드의 서부시대 영화에서 보안관들과 싸우는 악인의 이미지가 떠오르지는 않을까. 조금 더 심하게 말하면 백인들의 머리가죽을 벗기고, 그들의 아이와 여자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는 야만인의 이미지는 아닐까. 만약 인디언에 대한 이미지가 이러하다면 이는 100% 모두 백인들만의 관점에서 인디언을 파악하는 실수를 범한 것이다.

1492년 메이 플라워가 처음으로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 콜럼부스와 선원들은 오랜 항해와 전염병, 그리고 굶주림으로 매우 지쳐있었다. 그들을 처음 발견한 인디언은 카리브 해의 타이노족 원주민들이었다. 그들은 낯선 백인들을 집으로 데려가 음식과 선물을 대접했다고 한다. 초기 이주민들의 상황을 고려하면, 인디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들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콜럼부스는 인디언을 잡아 유럽에 노예로 팔고, 황금을 캐기 위해 인디언들을 학살한다. 백인들의 욕망이 평화로운 인디언들의 땅을 피로 물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금광이 발견된 1494년 콜럼부스는 유럽인 한명이 죽으면 타이노족 백명을 죽이라는 포고령을 내렸다고 한다. 콜럼부스를 위대한 탐험가 정도로 알고 있었던 필자가 한심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 후 백인들이 옮겨온 세균과 전염병은 ‘인디언들의 씨를 말렸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1492년부터 1900년 사이 인디언의 숫자는 90%나 감소되었다. 중앙 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 접경지대에 살던 인디언의 수는 5백만 명에서 25만 명으로 감소했다. 지금의 플로리다와 조지아 주에 살던 티무쿠안족들, 텍사스의 코아후일테칸 족은 1770년이 되자,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백인 이주민들이 인디언의 수를 압도하면서 인디언들은 점점 궁지로 몰렸다. 백인들은 좋은 땅을 자신들에게 팔고 인디언들을 보호구역으로 내몰려고 했다. 백인들은 그 대가로 인디언에게 돈을 건넸다. 하지만 인디언들은 그 땅을 팔 수 없었다.

인디언들은 자연의 법칙을 깨지 않아야만 자연이 사람을 지켜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백인들에게 되묻는다.

“우리가 어떻게 공기를 사고 팔 수 있단 말인가? 대지의 따뜻함을 어떻게 사고판단 말인가? 우리로선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부드러운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우리가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며, 또한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사고 팔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공기를 사고 팔 수 있단 말인가’중에서)

"충실한 개는 봉사와 헌신의 가치를, 허물을 벗는 뱀은 재생과 성장의 힘을, 꾀바른 코요테는 영리함을 가르쳐주었다. 겸손한 개미는 인내와 참을성의 가치를 일깨워주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동물들을 통해 위대한 정령의 지혜를 배웠다" ('내 앞에 아름다움, 내 뒤의 아름다움' 중에서)

인디언은 자연을 ‘아쿰키니마메훗(위대한 정령)’으로 인식했다. 인디언은 백인들처럼 자연을 개발이나 정복의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연과 소통하고, 자연 속에서 깨어나고 잠들었다. 자연은 ‘위대한 어머니 대지’였으며, 살아 숨쉬는 신적 존재였다. 마음이 혼란스러워질 때면, 증오의 불씨가 타오를 때면 인디언들은 자연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 속에서 햇살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색조와 노을, 새소리와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명상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그런 그들에게 몇 푼의 돈과 그들의 대지를 바꾸자고 하는, 백인들의 제안은 어불성설이었다.

백인들은 인디언과 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힘과 숫자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던 백인들은 그 조약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았다. 인디언들은 울타리를 치고, 야생마를 빼앗고,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사냥을 하는 백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인디언들의 관점에서는 대지는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이 대지에게 속한 것이었다.

자연과 더불어 살던 인디언들은 소수민족으로 몰락했고, 그 정신마저 사라져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외쳤던 자연 친화적인 주장을 이제서야 하고 있는 문명을 보노라면 씁쓸해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인디언들은 이미 자연을 아끼고 보호할 줄 아는 민족이었다. 아니 이런 표현도 정확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들은 자연의 일부였다.

이 책을 읽으며 필자는 그 동안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많은 관념들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다. 과연 내가 보고 느끼며 생각하는 이 모든 가치들, 역시 문명이 내게 강요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았다. 그리고 책을 덮으며 생각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는 민족이 누구인지.

마지막으로 1786년, 벤자민 프랭클린이 프랑스인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는 글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맺을려고 한다. 프랭클린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인디언들과 백인들 사이에 일어난 모든 전투는 백인이 인디언에게 가한 부당한 일들 때문이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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