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눈 뜨게 하는 역사책
'오늘'을 눈 뜨게 하는 역사책
  • 김태우 시민기자
  • 승인 2008.10.22 09: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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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강은 진실을 향해 흘러간다"

[북데일리]‘역사를 인식하는 사람’은 지나온 과거와 오늘, 다가올 미래의 흐름 속에서 ‘오늘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고민한다. 따라서 역사에 기록될 자신의 행적을 두려워하며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정하기 마련이다.

이에 반해 ‘역사를 인식하지 않는 사람’은 역사를 인식하지 않기에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오늘의 이익과 눈 앞의 권력에 현혹되고, 진실을 조작하고, 미화시키고, 합리화하려고 든다. 진실을 호도하면서 역사가 그들의 뜻대로 기록될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아무리 권력의 최면이 강력하다고 하더라도 '역사의 강'이 흘러가는 방향을 바꿀 수 없다. '역사의 강'은 진실을 향해서만 흘러가기 때문이고, 진실을 위해서 싸우는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쓰여지기 때문이다.

역사를 보는 자신의 눈을 가져라

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사>(한겨레출판사. 2006) 머리말을 읽으며 필자는 역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머리말의 핵심은 “역사를 보는 자신의 눈을 가지라”는 조언이었다.

보는 관점과 기준에 따라 역사는 그 의미를 달리 한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고, 단재 신채호 선생은 유가증권을 위조했다. 이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관점과 기준으로 역사를 보느냐에 따라 그 행동의 의미는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다가온다.

일본 제국주의의 관점으로 본다면 안중근 의사는 테러리스트일 뿐이며, 신채호 선생은 그저 유가증권 위조범에 불과하다. 하지만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은 모두 위대한 독립투사이다.

미국이 이라크전을 일으킨 상황도 마찬가지다. 이라크의 입장에서 보면 부시 정부의 횡포이며 석유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일 뿐이지만, 부시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 무기를 제거하고 후세인 독재정부를 축출한다는 구실로 이라크 민중을 해방시키기 위한 성전이다.

역사 인식의 무서움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견된다. 올바른 역사 인식은 ‘균형 잡힌’ 관점과 기준이 전제되었을 때에만 가능하다. 만약 누군가의 이익에 봉사하거나, 누군가의 편의에 의해 조작되었다면 이미 그것은 역사가 아니다.

똑같은 사건도 말하는 사람의 입장과 이해관계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 지를, 한 교수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羅生門)>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그리고 규정한다. “어느 누구도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친일파

한 교수는 해방 후 친일파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한반도가 동서냉전의 각축장이 되면서 남쪽에 반공정부가 들어섰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

일제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해방이 되었다. 해방 이후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민족 대 반민족의 구도는 좌우대립의 구도로 개편되었다. 좌우대립의 대치구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념과 계급적 입장이지, 민족적 입장이 아니었다.

반미특위의 해체로 인해 친일청산이 좌절되고, 친일파는 권력을 잡는다. 친일 세력들이 공산주의자를 때려잡는 사람들이 되면서 역사의 심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당시 미국은 백범 김구를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세력을 제휴대상으로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일본에 대해서뿐 아니라 민족의 자주성을 침해하는 모든 제국주의 세력에 저항하는 전투적 민족주의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옛 조선총독부 관리와 경찰들을 그대로 등용하면서, 그들이 ‘친일파(pro-Jap)’가 아니라 그저 ‘자기 직무에 충실했던 사람들(pro-job)’이라는 논리를 폈다. 그리고 친일진상규명법이 국회에 누더기로 통과된 최근까지 이러한 논리는 친일파의 자손들에 의해 반복되고 있다.

친일잔재 문제에 일생을 바친 임종국(1929~89) 선생의 말은 청산되지 않은 친일의 역사가 한국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 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친일파 문제는 한국사회의 원죄이다. 이 문제를 풀지 않으면 한국사회가 발전할 수도 없고 존재하기도 어려운 그런 난제이다. 민족분단의 문제가 여기서 비롯되었고 경제종속의 문제가 여기서 시작되었다. 군사독재가 친일파의 사생아이고, 사회혼란이 그 결과물이다.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어떤 문제이건 친일파와 관련이 없는 것은 없다… 실로 오늘 나타나는 우리 사회의 모든 병폐는 모두가 친일파가 저지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제대로 된 친일청산규명법’은 17대 국회로 넘어갔다. 역사 바로 세우기의 첫 단추는 바로 친일의 잔재를 한국사회에서 지우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근대사의 잘 못 끼어진 첫 단추를 제대로 다시 채우지 않고는 한국사회의 진정한 발전을 꿈꿀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으로 머무르지 않고, 현재와 이어져 소통하고, 작용하고 있다는 걸 필자는 깨달았다.

일본군 만주군관 학교 출신 한국 대통령을 아시나요?

흔히 사람들은 박정희 전(前)대통령을 평가할 때 난감해 한다. 그가 이룩한 경제적 발전의 업적과 18년간의 독재 사이에서 그의 공과를 따지기가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의 거울에 박정희를 비추어보면 그가 한국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친 인물인지 선명하게 드러난다.

한 교수는 젊은 시절 박정희의 인생에서 네 번의 변신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초등학교 선생에서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고, 해방 직후 광복군에 가담했다가 남로당에 가입한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순 사건 이후 단행된 숙군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수사에 동참하여 살아남은 것이 그 내용이다.

박정희는 늘 시대의 양지를 쫓아 숨가쁜 변신을 거듭했다. 한 교수는 박정희의 이러한 변신이 ‘기회주의자적인 성격’에서 기인한 행동이라고 진단한다.

16대 국회 법사위에서 공공연하게 “친일파의 대상을 중좌 이상으로 해야 한다”고 한나라당의 김용균 의원은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에 맞서 열린 우리당의 김희선 의원은 “일제시대 중좌 이상의 조선인은 단 한명도 없기 때문에, 차라리 이 부분을 폐기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더 바른 말”이라고 맞섰지만, 김희선 의원의 주장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김용균 의원은 왜 존재하지도 않는 중좌 이상의 조선인을 친일파로 규정하자고 주장한 것일까. 바로 박정희 전대통령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5.16 군사 내란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일제시대 말기 그의 행적에 비추어볼 때 대표적 친일파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는 “철저한 일본식 황국신민화 교육과 군국주의 교육을 받았고, 대통령이 된 뒤에 일본군국주의의 발전 모델, 특히 만주국에서의 경험에 따라 한국을 병영국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김용균 의원을 비롯한 친일 잔존 세력들은 박정희를 내세우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한국 근대사에서 박정희가 친일파로 규정하기 가장 어려운 인물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박정희를 친일파로 규정하지 않는 이상, 그 어떤 친일세력도 친일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일 것이다.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한국 역사는 일본군 군관학교 출신의 대통령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그 대통령의 군사내란을 고스란히 모방한 군사 정권을 만들게 된다. 그렇게 역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었다.

광주항쟁과 6월 항쟁 세력 VS 군사독재 정부 세력

광주민주화 항쟁이 일어났을 당시, 언론들은 군사독재 정부가 불러주는 대로 기사를 받아 적었다. 한 교수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상 받는 것도 아니고 뻔히 감옥 갈 일을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고 했다는 말을 그들은 믿어주지 않았다. 그러니 없는 배후를 만들어야 했고, 광주 시민의 항쟁은 고정간첩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야 자신의 상급자들을 납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군사독재 정부는 민주화의 열망으로 불타 오르던 광주시민을 폭도로, 고정간첩으로으로 몰아 부쳤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는 미국에서는 성조기를 태워도 처벌을 받지 않는데, 한국사회에서는 성조기를 태운 강원대생들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을 받았다. 이 얼마나 웃지 못할 코미디인가.

1987년의 6월 항쟁과 이한열의 장례식 때 민주세력은 결집했다. 그리고 2002년 반미운동의 물결로 광화문을 뒤덮었다. 민주 세력이 서서히 다시 기지개를 피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회 곳곳에서 진보와 개혁을 향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역사적인 관점을 가지고 오늘을 본다면 그 외침들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하지만 진실의 왜곡하고 그들의 권력을 위해 국민을 유린하던 그들은 아직도 한국사회의 기득권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들 중 누군가는 친일파의 후손이고, 그들 중 누군가는 군사독재의 혜택을 입은 자들이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대한민국사>를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밑줄을 그으며 읽었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고, 역사와 오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만약 <대한민국사> 3권이 나온다면 그 내용은 무엇일까. 아마도 2004년 봄에 대한 이야기가 분명히 한 페이지를 장식할 거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2004년 봄,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다. 더구나 광주학살의 원흉들이 모여 만든 민정당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한나라당과 3당 통합을 거부하며 탄생한 민주당이 손을 맞잡고 탄핵소추안을 ‘국민의 이름으로’ 가결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친노 대 반노의 싸움으로 총선을 치루려는 전략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사>를 읽고 필자가 느낀 바에 따르면 이번 싸움은 친노와 반노의 싸움이 아니라, 친일파와 군사독재정권의 후손들, 친미주의자들인 반민주 세력과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민주 세력간의 일전이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역사를 알아야 오늘을 보는 눈이 떠진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대한민국사>를 적극 추천한다. 마지막으로 한 교수가 언급한 문익환 목사의 시를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맺을까 한다.

’역사’하니, 문익환 목사님의 시가 생각납니다.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산다는 것이라는 말씀이 말입니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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