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이런일이] 세종은 절대음감 소유자?
[책속에이런일이] 세종은 절대음감 소유자?
  • 김대욱 기자
  • 승인 2008.08.12 07: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반음의 10분의 1높이 차이' 알 정도로 음감 뛰어나

“세종은 분명 조선의 악성(樂聖)이었다.”

[북데일리] 조선시대 세종대왕이 절대음감의 소유자였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그런데 ‘세종실록’을 보면 이에 대한 일화가 나온다.

세종 15년(1433) 1월 1일. 새로 만든 편경이 선보이는 날이었다. 편경은 돌로 만들어져 일정한 음을 내 조율 악기로 사용된 악기다.

편경을 만든 책임자는 악학별좌 박연이었다. 그가 소리를 내자 세종이 곁으로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이 소리 하나가 약간 높은데 무엇 때문인가?”

그러자 박연이 대답했다.

“편경을 잘라내기 위해 친 먹줄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제대로 다 갈지 않아서 음이 높았습니다.”

먹줄이 남아 음이 높다는 건 무슨 뜻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편경의 제작 방법을 알아야 한다.

편경은 옥돌이라는 경석으로 만든다. 먼저 경석 위에 먹줄로 모양을 잡고 철사로 잘라낸다. 이때 금강사라는 고운 모래를 뿌리면서 간다. 돌의 두께를 맞추면서 적당한 음을 찾는 것이다. 만약 두께가 두꺼우면 음이 높고, 얇으면 음이 낮아지는 식이다.

그렇다면 세종이 지적한데로, 먹줄 하나 두께면 음이 어느 정도나 차이 나는 걸까. 신간 <한국사傳3>(한겨레출판. 2008)에 따르면 약 10센트(cent)다. 10센트는 반음의 10분의 1높이로 누구도 구분하기 힘든 작은 차이다. 세종은 그 미세한 차이를 알 정도로 뛰어난 음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세종의 범상치 않은 음악성을 짐작케 하는 일화는 또 있다. 세종 7년(1425)의 일이다. 박연은 악기의 기준음을 내는 기구 황종율관을 제작했다. 중국의 방식을 따라했는데, 결과는 실패였다. 이를 본 세종은 그 원인을 정확하게 짚었다. 세종실록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나라가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어 춥고 더운 기후와 풍토가 중국과 현격하게 다른데 어찌 우리나라의 대나무로 황종관을 만들려고 하는가. 우리나라는 소리가 중국과 다르기 때문에 중국의 옛 제도를 조사하여 황종관을 만드는 것은 옳지 않다.”

이후 박연은 몇 차례 더 도전했고 황종율관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이 밖에 세종은 “막대기로 땅을 치면서 박자를 맞추면서 하루저녁에 다 만들었다”는 노래 ‘용비어천가‘를 작곡했다. 우리 음악에 맞는 악보 ’정간보‘를 창안하기도 했다.

책은 이렇게 한 인물을 중심으로 한국사를 살펴본다. 3권에서는 세종 말고도 백제 무령왕, 정희왕후, 허난설헌, 곽재우, 광암 이벽, 발해 문왕 대흠무 등을 다룬다. 같은 시기에 출간된 2권은 소현세자빈 강씨, 토정 이지함, 김윤후, 내시 김처선, 김춘추 등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