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화]어지러운 세상을 그리다
[정보화]어지러운 세상을 그리다
  • 정보화 시민기자
  • 승인 2008.06.24 14: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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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한 서술은 당시의 비극을 극명히 보여준다.

[북데일리] 어느 시대건 돌아보면 어지러운 시간이 있는 법. 그 시간을 어지러이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지러움을 미리 깨닫는 혜안을 가진자도, 물리치는 자도 있게 마련이다.

선조 16년, 이탕개의 난. 그 싸움은 다가올 임란에 대한 작은 예고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미 역사의 시계추는 돌아가고 있었다. 권오단은 그 시절로 시계를 한없이 돌려낸다. 어지러울 <난>(포럼.2007)의 시대다.

 
때는 조선 선조시대. 동, 서인으로 갈린 당파의 싸움이 안으로 잦아들고, 이이제이식의 오랑캐막기는 서서히 그 흉폭함을 내비치기 시작한다.

어린 세자 광해군과 시대의 혜안 이율곡만이 어둔 담장 아래 총기를 빛내고 있을때 북방에서 오랑캐의 반란이 일어난다. 반상을 가리지 않는 이이의 씀씀이로 전쟁터에 나가는 바우와 백손. 그들의 활약상이 읽는 이를 저 먼 북방의 어느 곳으로 옮겨놓는다. 그런 통쾌함 이면에는 내부의 균열이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었으니, 몸을 해하는 공격이 아니지만 그보다 더 한 마음의 공격이다.

 

자신들의 밥줄만을 생각하고, 반상을 가리는 가진자들의 가려진 횡포. 이 얼마나 무섭고 혐오스러운가. 진정 나서야 할 곳이 아닌 자신의 체면머리 지키는 것만 아는 그들이 어찌 그 시대에만 있다고 할까. 시대를 타고 흘러온 그 횡포에 문득 소름이 돋는다.

그러나 <난>에는 어려운 시대를 지켜나가는 사람 또한 있다. 미래의 어려움을 내다보고 시무육조를 이야기하며 나라와 군주와 사람을 사랑하는 이이가 있다. 빈천의 차를 무릅쓰고 전선에 나가 용맹함을 떨치는 바우와 백손이 있다. 그들을 아끼고 격려하는 동료들이 있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마냥 마음 아프지만은 않다.

오히려 가지지 못한 자의 국가와 민생 사랑에 울컥한다. 왜 세상은 정말로 필요한 자들을 필요한 자리에 데려다놓지 못하는지. 아니, 그래서 그들의 모습은 더 아름다워보이는지도 모른다.

<난>은 대단한 스토리를 그려내고 있지는 않다. 임란 전 작다면 작은 북방의 난인 '이탕개의 난'을 그리며 천민인 바우와 백손의 활약상을 그리고,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하나 당파에 밀려 쓸쓸이 죽어가는 이이의 삶을 뒤쫓을 뿐이다. 그러나 너무 몰입하지 않은 담백한 서술은 당시의 비극을 더 극명히 보여준다. 결국 이이도 죽고, 바우와 백손 또한 마지막 싸움을 끝으로 자신들의 길을 떠난다.

책의 말미, 임금과 신하들은 후회(後悔)한다. 시간이 지나고서야 이이의 충절과 그의 혜안을 아쉬워하고 뉘우친다. 그러나 이미 임란은 시작되고 역사의 바퀴는 다시금 돌아간다. 마지막 소제목인 후회가 유난히도 마음에 깊이 새겨지는 요즘이다. 뒤돌아 뉘우치는 일 없이 바른 시기에 바른 결정을 하는 것.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필요한 한마디 말이 아닐까 싶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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