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근의시편지] 국경꽃집에 꽃 피는 봄이 오면 . . .
[최창근의시편지] 국경꽃집에 꽃 피는 봄이 오면 . . .
  • 북데일리
  • 승인 2008.03.03 03: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중일의 [국경꽃집](창비, 2007)

나는 정신의 아픔을 많이 겪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아픔에 대해 말할 권리가 있다.

- 앙또냉 아르또(1896-1948)

울적한 K군 보세요.

삼월인데도 눈이 내리네요. 창문을 열고 장난감 사진기로 흩날리는 눈발을 몇 점 담다가 문득 K군 생각이 났어요. “밤새 내리는 비가 새벽 창문에 자글자글한 주름을 만든다. 주름 많은 나의 창문들. 몽상이 덮고 잠든 차가운 이불.” K군의 첫 시집 끝에 붙어있는 <시인의 말>에 나와 있는 대목이에요. 눈이 오는 날 K군의 방안 풍경을 살짝 엿보고 싶어지는 까닭입니다.

시집 재밌게 잘 읽었어요. 시집을 읽고나니 ‘상처’, ‘쓸쓸함’, ‘환상’, ‘초현실주의’ 같은 단어들이 두서없이 떠오르네요. ‘이야기’, ‘드라마’, ‘극적 상황’ 같은 말도 같이 따라오고요. 대표작으로 자주 인용되는 <국경꽃집의 일일>과 <나는 국경꽃집이 되었다> 그리고 신춘문예 당선작인 <가문비냉장고>를 가만가만 음미해봅니다.

국경꽃집은 `누나`이기도 하고 누나의 `노란 머리핀`이기도 하고 아버지가 가 있는 사막의 `붉은 선인장`이기도 하고 어느 날 `포클레인에 힘없이 구겨진 파란대문`이기도 하겠네요. 안개꽃, 튤립, 해바라기 . . . 각양각색의 무수한 꽃을 파는 곳도 아닌 국경꽃집의 빛나는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나는 왜 자주 한 그루 국경꽃집 같은 나무가 되었을까요?

그러고 보니 시집에 마련된 가설무대가 모두 궁금해지네요. <구름이 구워지는 상점>과 <두 겹의 저녁으로 보는 테라스>와 <창문 한 접시가 놓인 식탁> 아, 그리고 <두근거리는 신전>, <밤구름방직공장>, <성사거리도서관> 음, <수양버들 속의 집 한 채>에 <성>까지도.

무엇보다 <수양버들 속의 집 한 채>와 <성>에 지어놓은 “우리집 마당”에 서 있는 “우리집보다 오래된 수양버들” 속에 세 들어 사는 “수양버들보다 오래된 어느 작은 종족의 눈부신 집 한 채”와 “공중에 거꾸로 떠 있는 양초로 지은 성”은 참 아름다워요. 누구나 그런 집에서 단 하루만이라도 살고 싶을 거예요.

시집의 마지막 시 <Sorrow shadow>에서 K군이 소망을 담아 중얼거리듯 이제는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그 유년의 집에서 저도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코끼리야, 낙타야, 기린아, 구렁아, 여우야, 까마귀야, 독수리야, 나비야, 시궁쥐야 . . . 우리들의 영원한 고향으로 가는 구름의 문이 닫히기 전에, 달빛이 다시 마을을 비추기 전에 모두, 모두 너무 아름다워서 슬퍼야 했던 그림자를, 이젠 돌려줘도 좋아”

시집을 덮고 나면 화사해서 오히려 애틋해지는 아련함이 박하 향처럼 입안을 맴돕니다. 현재와 과거에 걸쳐 두 겹의 삶을 힘겹게 꾸려가고 있는 투명하고 맑고 깨끗한 소년의 내성적인 모습이 눈에 어리네요. 현재와 과거, 현실과 꿈의 이미지를 양 손에 쥐고 있지만 어느 새 그 모두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오롯하게 상상의 나이만을 먹고 사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소년. 두렵군요. 이 안타깝도록 해맑은 시편에 행여 때가 묻고 금이 갈까 봐, 훅 하고 바람이 불어 한 편 한 편에 묻어있는 순결한 시혼이 어느 순간 날아가거나 바스라질까 봐.

혹시 [군중과 권력]이라는 명작을 남긴 불가리아 태생의 작가 엘리아스 카네티의 단편소설 <국경 위의 집> 읽어보셨어요? 아니면 체 게바라의 청년시절을 담은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저자인 브라질의 극작가 호세 리베라의 희곡 <흐르지 않는 시간>은요? 틈이 나면 꼭 한 번 챙겨보세요.

특히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신비로운 여인을 동시에 사랑하게 되는 형제 이야기를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옮겨놓은 <흐르지 않는 시간>은 인간 본연의 외로움을 툭툭 건드리고 지나가는 게 추억의 형식을 빌린 울적한 K군의 몽환적인 시들을 연상시키거든요.

황사가 짙게 깔려 희뿌연 서울의 봄하늘 밑에서 문득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 K군의 국경꽃집을 생각합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있고 또 어디에도 없을 그 집 앞 꽃밭에 누워 몽골 초원의 빛깔을 닮은 가없이 짙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새의 부리로 자화상을 그려보는 거지요.

그러니까 제가 그곳으로 갈 때 K군이 사용하는 마술사의 모자를 빌려주시면 좋겠네요.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아무도 모르게 휙, 사라질 수 있도록 말이에요.

* 편지 왔어요-답신 1*

한때 내 몸은 내 몸이 낳은 투명한 유리로 수많은 비구름을 통과했다 비구름의 무리에 말을 걸고 그 말을 거울삼아 생활의 신조를 만들어 하늘의 다리에 걸어놓았다 비구름이 풀어놓는 신기한 이야기를 그래도 사랑을 믿는 어리석은 친구에게 나는 깔깔거리며 들려주었다 한때 내가 유일하게 안심한 나를 통과한 비구름은 얼음의 벽을 타고 잠든 지상까지 내려와 새와 나무와 물과 바람의 주소를 일러주었다 그들을 만나러 서둘러 길을 떠났지만 나의 기도만큼 그들은 멀리 있었고 있는 힘을 다해 목청껏 나는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세웠다

내 풍만한 가슴을 열면 그때 떠난 수천 개의 비누방울이 번뜩이는 눈처럼 몽글몽글 떠다닌다 비구름이 비구름인지도 모르고 막연히 좋아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지 비구름이 흩어진 사이로 맑은 햇살이 날아들었던 게 언제였더라 아 뭐였더라 그때 내가 기억한 것은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나를 알 수도 없었던 그 목덜미가 추운 사내는 다 낡고 헐렁헐렁한 내 구두와 양말은 또 막막한 빗줄기 사이로 부스스하게 떠오르던 당신의 잊어버린 얼굴은 나의 그림자를 이끌고 그대가 달려가던 그 푸른 풀밭은 풀밭 위로 솟아오르던 눈부신 태양은 서서히 터 오르던 벅찬 여명의 빛은 여명의 검은 눈동자처럼 여명 속에 깃든 석양의 무리는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양 손가락 사이를 스륵스륵 빠져나간 강물의 살은 흐르는 강물처럼 흔적도 없이 변해버린 꿈꾸고 있지 않은 꿈같은 그 아름다운 날들의 다시 돌아오지 못할 오래된 기억은

- <자화상 . . . 기억한다, 그대여> 전문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