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의동화세상] 조각보에 깃든 5대의 사랑
[헬렌의동화세상] 조각보에 깃든 5대의 사랑
  • 북데일리
  • 승인 2008.02.18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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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책장에 꽂힌 그림책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요? 당연히 자녀들의 몫이라구요?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오늘 다시 한 번 서가를 뒤져 보세요. 분명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 컬렉션이 탄생할 테니까요.

가끔 동화 속에서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무언가를 발견할 때 낮은 한숨을 쉬게 됩니다. 이런 보물을 공유할 어른들이 많지 않다니!

<할머니의 조각보>(2003. 미래아이)에도 역시 한숨이 묻어납니다. 동화세계의 주인인 어린이. 그들의 세계에만 묶어두기엔 아까운 책이기 때문이죠.

지은이 패트리샤 플라코는 다문화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아일랜드계이고 어머니는 유태인계이지요. 덕분에 힘든 나름대로의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녀의 작품은 깊어졌습니다. 러시아에서 이민 온 외가는 많은 작가를 배출한 집안이었다고 하니 그 뿌리가 그녀를 더욱 단단하게 해주었음은 물론이죠.

<할머니의 조각보>는 그 모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조각보를 통해 5대를 거슬러 올라가볼 수 있는 뭉클한 가족사랍니다.

패트리샤 플라코. 그녀의 증조할머니 안나. 안나는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입니다. 처음에는 친구들이 하는 말이 꼭 얕은 물살이 조약돌을 훑고 지나가는 소리처럼 들리죠. 여섯 달 쯤 지나서야 물소리가 아닌 말소리로 듣게 되었지만요.

낯선 미국 땅에서 다른 것은 금세 적응했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바로 `바부슈카`. 안나가 입고 있던 옷과 머리에 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자라 바부슈카가 작아지면서 그것으로 조각보를 만들기로 결정합니다.

이제 이웃에 사는 아주머니들이 모여 작업을 시작합니다. 아주머니들은 옷에서 동물모양과 꽃모양을 오려내어 하얀 천에 덧대었습니다. 조각보 가장자리는 안나의 바부슈카로 마무리 되었죠.

드디어 역사적인 조각보가 완성되었습니다. 이 조각보는 안식일 기도할 때 식탁보가 되었습니다. 안나가 성인이 되어 패트리샤 플라코의 증조할아버지인 샤샤의 사랑고백을 받았을 때에는 멋진 깔개가 되어주었죠. 그들의 결혼식 때 신랑, 신부를 씌워주던 천막(후파)도 이 조각보였답니다. 그 뿐인가요? 패트리샤 플라코의 할머니 칼이 태어났을 때 감싸안은 이불도 바로 그 조각보였는걸요.

이제 이 조각보는 5대를 걸쳐 그녀들의 결혼식과 탄생을 함께 합니다. 패트리샤 플라코의 어머니 메리 엘렌이 태어났을 때도 물론 함께였죠.

증조할머니 안나의 아흔 여덟 번째 생신. 식구들은 그녀가 러시아에서 먹던 건포도와 과일젤리가 듬뿍 든 쿨리치 케이크를 먹습니다. 그리고 안나 증조할머니는 돌아가시죠.

그녀의 집안 대대로 그랬던 것처럼 패트리샤 플라코 역시 조각보에서 탄생을 맞이합니다. 그녀의 첫 생일날 식탁보가 되어준 것도 그 조각보였지요. 운 좋게도 그녀는 대대로 내려온 조각보에서 매일 밤 잠이 들었습니다. 조각보에 있는 동물 모양을 손가락으로 따라 그리다가 잠이 들 곤 했지요.

그럴 때 어머니 엘렌은 그 조각보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말은 누구 옷소매로 만들었는지, 닭은 누구 앞치마로 만들었는지, 또 꽃은 누구 치마를 오려 만든 것인지 말이죠. 그리고 누구의 바부슈카가 조각보의 가장자리가 되었는지 도요.

조각보는 투우놀이 할 때는 망토가, 때로는 텐트가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의 결혼식 때에도 기꺼이 그녀와 함께 했죠.

이십년 전 패트리샤 플라코가 딸 트레시를 낳았을 때 그 아이를 처음 감싼 것도 이 조각보였습니다. 언젠가는 트레시와 함께 이 조각보도 떠날 날이 있겠죠.

29페이지의 얄팍한 책에 담긴 한 집안의 역사. 그럼에도 감동이 묵직한 것은 어쩌면 절제된 연필화에서 오는 빛바랜 추억의 빛깔 탓인지도 모릅니다.

[칼럼니스트 신주연 snow_forest@naver.com]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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