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든 우리를 깨운 `혀`
잠든 우리를 깨운 `혀`
  • 북데일리
  • 승인 2008.01.08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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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 <혀>(문학동네. 2007) - 사랑의 불가사의를 맛보는 혀

[북데일리] 소설을 읽다 잠들었다. 그리고 생생한 꿈을 꾸었다. 무척 살기 좋다는 어떤 별나라가 나왔다. 모두들 이주한다고 분주했다. 거기엔 이주조건이 하나 있었다. 언어가 없어도, 음식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별나라이기 때문에 지구에서 사용하던 혀는 떼놓고 가야한다는 거였다.

티켓을 받고 승선대로 가던 나는 이내 ‘사랑’ 이란 단어를 중얼거렸다. 지구에서 내뱉는 마지막 말이었다. 그리고는 결국 티켓을 찢고 공항을 뛰쳐나왔다.

이상한 꿈이었다. 해몽을 한다면 이런 내용쯤이 아닐까. 그 어떤 행복도 사랑의 말을 하는 혀 없이는 취하지 않겠다는 나의 의지표현....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건 불행의 모든 것이다. 거기에서 이 소설 <혀>는 시작된다.

멈출 수 없는 혀

‘음식을 먹는다는 건 절대적이고 반복되는 활동이다. 그건 사랑도 마찬가지다. 일단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

사랑을 키워가기 위해서 연인들은 같이 음식을 만들어 먹어봐야 한다. 그들이 속삭이는 사랑의 ‘불충분한 말’ 들은 음식과 함께 혀 위에 놓여 있다가, 잘 익은 맛을 뿜어내면서 목구멍으로 미끄러져간다. 음식을 같이 먹는 건 구체적 사랑의 전달방법이다. 그러나 변질되는 음식처럼 사랑도 불안정하다. 경력 13년의 베테랑 요리사이자 자신의 쿠킹클래스를 오픈한 지원은, 수강생 세연에게 7년의 사랑을 빼앗긴다.

지원이 외출했다 늦게 돌아온 날, 석주와 세연은 지원의 키친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이 때부터 지원의 혀는 어둠 속에 웅크려있게 된다. 사랑을 맛보아야하고 이야기해야하는 기능을 상실한 채. 주인의 발목을 핥을지 목덜미를 물지 모를 오래 키운 개, 폴리의 모습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지원은 멈출 수 없는 사랑에의 집착을 가지게 된다. 한편 지원의 삼촌은 숙모와의 비극적 사랑의 결말로 인해 조절할 수 없는 알코올에의 집착을 가지고 있다. 사랑은 사는 일에 균형을 잃게 만들어놓았다.

<나의 모든 것이 싹 사라지고 오직 한 개의 분홍빛 혀로만 남아버린 것 같다. 좋은 요리사가 되겠다면 지금이 적기다>

1월에 불을 지핀 지원의 애증은 점점 데워지기 시작하여 무더운 계절 7월에 이르러 비등점을 기록한다. 사랑의 파멸을 요리하기에 적정한 온도에 이른다. 석주의 떠남으로 지원과 함께 남겨졌던 개 폴리까지 죽는다. 그런데도 지원의 맛에 대한 감각은 최고조에 달해간다. 이런 생동감은 석주와 세연의 사랑을 목격한 그날 가졌던 ‘복숭아는 포크로 푹 찍어서 먹어야한다‘는 지원의 상상 속 공격성이 증폭된 결과이다.

사랑의 불가사의를 맛보는 혀

지원이 행해가는 파행적 사랑은 19세기 미식가 브리야 사바랭의 말로 설명될 수 있다. “진정한 미식가란 정복자만큼이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이다.” 미식가들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정복하듯 맛보아나갔고 맛의 황홀 앞에 스러진 존재들의 그 어떤 고통도 알 바 아니었다. 석주와 세연의 사랑이 그랬고, 지금 지원의 사랑도 그렇다.

사랑은 음악이나 음식과 같다고 소설은 말한다. 음악도 그러하지만, 어떤 특정한 음식은, 만일 그것이 중독성이 강한 것이라면 처음 맛보는 순간부터 우리에게 위협이 된다. 지원의 사랑은 양귀비꽃을 씹는 것과 같았다. 옳고 그름을 따질 틈 없이 씹어 우물거릴수록 헤어 나올 수 없는 환각의 사랑. 언제나 그렇게, 사랑은 위험하다.

파멸하지 않으려는 지원의 사랑은 탄력으로 저항하는 혀 요리에 양념으로 스며든다. 석주가 맛보는 혀 요리는 바로 지원이 품은 사랑의 맛이다. 절망과, 애원과, 기대와, 분노를 향신료로 섞어 넣어서 단번에 파악할 수 없는 맛. 석주가 그 요리에서 최고의 맛을 느낀다는 건 사랑이 가진 가장 큰 속성, 미스터리와도 같다. 자신이 일으켜 세운 욕망을 스스로 잘게 씹어 붕괴시키는 맛은 어떤 것일까. 어쩌면 이 맛이 사랑이라는 음식의 본질적 맛인지도 모른다.

혀는 입속에 숨겨진 관능이다. 관능은 보이지 않을 때, 상상의 공간에서 가장 높은 온도로 올라간다. 소설속의 음식과 사랑을 맛보며 우리안의 잠자는 감각들을 일깨운다. 소설 <혀>는 사랑과 삶을 새롭게 느끼게 하는 문학의 킨제이리포트이다.

얼마나 활자에 혀를 갖다 대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곧 감각이 무디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강한 맛을 지닌 조경란의 언어들. 그러나 걱정할 것 없다. 상상의 맛 앞에 우리 정신의 혀는 결코 무디어지지 않는다.

픽션의 예민하고 팽팽한 감각이 무디어진 현실을 일깨우는, 소설문학의 힘이 여기에 있다. 낭독회에서 조경란은 말했다. “사랑을 벼랑 끝까지 몰아붙여 보았어요. 여러분이 지원이 되어서 사랑을 통과해보세요.” 이제 혀를 꿈틀거리며, 당신 속에 끓고 있는 사랑의 뜨겁고 깊은 맛을 볼 때가 되었다.

(일러스트 - jeje)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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