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대신 의심 가르쳐라!
믿음 대신 의심 가르쳐라!
  • 북데일리
  • 승인 2008.01.08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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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얼마 전에 재미있는 칼럼을 읽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과학 칼럼리스트 이인식 과학 문화연구소장의 글이었는데 주제는 신경신학이었다. 신경신학은 인간의 영성과 뇌의 관계를 탐구하는 신생 학문이다.

칼럼은 “성당이나 절에서 신자들이 기도와 명상을 통해 절대자와 영적으로 일체감을 느끼는 신비체험을 할 때 뇌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의 신경과학자인 앤드루 뉴버그에 따르면 명상이나 기도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 머리 꼭대기 아래에 자리한 두정엽 일부에서 기능이 현저히 저하되고 이마 바로 뒤에 있는 전두엽 오른쪽에서 활동이 증가되었다고 한다. 종교의 신비 체험은 간질과도 강관이 깊단다.

미국의 신경학자인 노먼 게슈빈트는 간질이 때때로 강력한 종교적 체험을 유발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신은 인간의 뇌가 만들어낸 개념에 불과하며 뇌 안에 항상 머무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마르크스가 왜 종교를 마약에 비교했는지 이해가 간다.

지난 해 최고의 인문학 서적으로 선정된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김영사. 2007)도 비슷한 결론을 내린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기보다는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는 표현이 진실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는 신앙은 그 어떤 정당화도 요구하지 않고 어떤 논증에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악 내지 망상이라고 단정 짓는다.

도킨스는 유전자의 특징이 이기적이고 인간은 유전자의 조종을 받는다고 주장해 센세이션을 일으킨 학자. 발표하는 책마다 자연과학과 인문학 모두에서 엄청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종교엔 물론 긍정적인 요소도 있지만 그는 진화론의 입장에서 창조론과 종교의 비합리적인 요소, 그것이 사회에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에 더 주목했기 때문에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나섰다.

실제 신의 이름으로 수많은 전쟁이 벌어졌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지 않는가? 저마다 관용과 사랑을 외치지만 실제 종교의 이름으로 불관용과 증오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 필요한 이유는 도덕 때문이었단다. 한 사회가 지탱하기 위한 최소한의 도덕이 신이나 내세 관념을 통해서 유지될 수 있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는 인간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이 있기 때문에 굳이 신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신에 대한 부정은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가치인 진정한 사랑을 찾는 일이 될 것이라며 이성에 대한 낙관론을 편다.

500쪽이 넘는 두께에 내용도 난해한 편인데 이 책이 그렇게 많이 팔린 이유는 뭘까? 저자의 인지도와 완성도 때문이기도 했지만 시의성을 탔던 요인도 있다. 이 책이 나올 당시, 분당의 샘물 교회가 아프카니스탄에서 벌였던 선교 활동과 인질 납치 사건이 있었다. 기독교의 배타적인 선교 방식에 대한 극렬한 찬반 논쟁이 우리 사회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2001년 911 테러 이후 부시의 기독교 근본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 간의 충돌이 세계사적인 문명 충돌의 양상으로 부각되고 있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도킨스는 기독교와 이슬람교 등 모든 형태의 근본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균형적인 시각에서 문명충돌 의 본질을 냉철하게 파헤치고 있다. 원인 분석과 함께 대안을 다각도로 제시하고 있다.

어떤 걸까? 그는 신앙보다 더 위험한 것은 신앙을 미덕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행위라고 본다. 신앙이 교육과 결합했을 때 그 해악은 끔찍하다. 전에는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고 최근에는 자살 테러와 인간 폭탄을 양산하고 있다. 그는 아이들에게 믿음 대신 의심을 가르치라고 주문한다. 의문 없는 신앙이 우월한 가치를 지닌다고 가르치는 대신 자신의 믿음을 통해 질문하고 생각하는 법을 가르친다면, 자살 테러범은 없어질 가능성이 높단다.

논술은 언제나 세상 돌아가는 일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왔다. 종교 문제는 서강대를 제외하면 거의 나오지 않았지만 올해 갑자기 출제되기 시작했다. 11월말과 12월 초에 실시된 한양대 수시와 성균관대 수시에서 종교 문제가 출제된 것이다. 1월 3일부터 시작된 올해 정시 논술 고사에서도 분명 나올 공산이 크다.

혹시 “당신은 신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신은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이다. 이성을 신봉하는 나는 그런 의미에서 무신론자에 가깝다.” 정확히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의 입장이다.

신을 찾는 개인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가족이 죽었다든지, 정신적으로 굉장히 힘들 때 신에 의존하는 것까지 문제 삼을 필요가 있겠는가? 다만 그것이 혼자만의 믿음이 아니라 조직화됐을 때가 문제다. 종교든 뭐든 조직화했을 때 그리고 그 조직이 다른 조직을 압도할 정도로 성장했을 때 부패와 타락의 가능성은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개인적 믿음이 조직화될 경우, 집단 광기나 집단적 증오로 연결되는 건 시간문제라는 것이 인류의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지 않는가? 필자의 결론은 종교가 필요하더라도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 인간 내면의 차원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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