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과 정명훈, 요리로 만난 사연
베토벤과 정명훈, 요리로 만난 사연
  • 북데일리
  • 승인 2007.10.29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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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영화 <카핑 베토벤>은 위대한 마에스트로, 베토벤의 일생 중에서 <교향곡 제 9번 합창곡>부터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를 다뤘다. 영화의 주인공은 안나와 베토벤, 그리고 <합창교향곡>이다. 음악이 영화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랐다는 감독의 소망대로, 영화는 <합창교향곡>의 초연 장면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이 영화를 절대로 놓치지 않았을 것 같은, 이 시대의 마에스트로 정명훈은 일찍이 합창곡을 이렇게 평했다.

"위대한 베토벤 스스로도 최고의 작품이라 여겼던 <교향곡 제9번 합창곡>은 기쁨을 나누는 자리에 잘 어울린다. 고뇌를 넘어 환희에 이르는 감정이 극치의 경지를 이루고 있어 벅찬 감동을 경험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이 곡을 들으며 먹으면 좋을 음식으로, 게와 새우, 그리고 새우 국물을 뭉근히 끊여 만든 `게소스 스파게티`를 추천했다. 진한 풍미의 게소스 만드는 법은 그의 요리책, <정명훈의 Dinner for 8>(동아일보사, 2003)에 자세히 나와 있다. `한 요리`하는 그가 사랑하는 아내와 세 아들, 그리고 미래의 반려자들을 위해서 직접 쓴 요리 책이다.

요리를 통해서 삶의 조화와 균형을 회복했다는 그의 요리책에는 독특하고 소박한 웰빙 레시피와 그와 잘 어울리는 추천 음반이 소개되어 있다. 마에스트로 정명훈만의 독특한 요리 레시피와 추천 음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자.

@ 고기 요리에는 대담하고 힘찬 리듬이 잘 드러난 베토벤의 <교양곡 제 3번 영웅>이 어쩐지 떠오른다. 영웅의 허망한 모습을 담은 비극적인 정서와 장중한 피날레, 다채로운 음악적 변주 등 베토벤의 개성이 잘 드러나 있다.

@ 꼬리찜을 먹으며 <교향곡 제 5번 운명>을 들으면 마치 최후의 만찬을 즐기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이내 운명에 굴하지 않고 맞서 승리하는 이의 쾌감을 맛볼 수 있다.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원할 때 들으면 좋다.

@ 슈베르트의 서정적이고 로맨틱한 선율이 잘 살아 있는 <교양곡 제 3번>은 토마토를 곁들인 상큼한 오이페타치즈 샐러드와 잘 어울린다.

@ 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이나 마음이 울적할 때는 차이코프스키의 <세레나데>가 제격이다. 우울한 기분을 달래고 위로하는 듯한 바이올린의 애절한 선율에 푹 빠져 있다 보면 어느 새 우 울한 감정이 달콤하게 느껴질 것이다.

@ 부부나 연인끼리 제철 가지를 듬뿍 넣고 만든 토마토소스 스파게티의 풍부한 맛을 즐길 때는 드보르자크의 <세레나데>로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해보자. 현악기만으로 연주되는 부드럽고 정감 어린 선율이 사랑하는 이들의 속삭임처럼 들린다. 서정적인 선율이 매력적인 2악장은 반드시 감상할 것.

@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음색이 특징인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은 연인들의 감미롭고 로맨틱한 분위기 연출에 더없이 훌륭하다. 구운 가지에 치즈를 듬뿍 올린 가지 라자녜를 먹으며 피아노 선율에 심취하노라면 사랑의 감정 또한 풍부해질 것이다.

@ 에릭 사티의 <너를 원해>는 달콤한 디저트, 애플 크럼블을 연인과 한입 씩 나누어 먹으며 들을 수 있는 예쁜 곡이다. 우리나라 CF에도 많이 쓰여 귀에 익은 선율이 감미롭기 그지없다.

@ 다소 나른해지는 한여름 점심 식사로는 시원한 생 토마토 스파게티를 먹으며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을 추천한다. 서곡, 야상곡, 결혼행진곡 등 친숙하고 편안하게 귀에 익은 곡들이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100명이 넘는 단원들을 지휘하듯이, 각각 맛이 다른 재료들을 조화시켜 하나의 요리를 능숙하게 만들고, 그에 어울리는 음악까지 추천하는 내공이 예사롭지 않다. 알고 보니, 아주 어린 시절부터 요리하는 것을 무척 좋아해 부모님이 운영하는 코리안 식당의 주방일을 거들었다고 한다. 요리가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에, 지금도 아내에게 좀처럼 요리할 기회를 주지 않을 정도다.

첫 장을 펴자, 세계를 누비는 음악가답게 푸아그라, 캐비아 등 최고급 재료로 만든 고급 요리들을 즐길거라는 편견은 일찌감치 깨졌다. 텃밭 가꾸기가 취미인 아내를 닮아, 텃밭에서 직접 가꾼 루콜라로 만든 신선한 샐러드와 기르는 닭이 갓 낳은 따끈한 달걀로 만든 오믈렛을 즐겨 먹는단다. 어쩌다 생긴 자투리 재료, 파뿌리나 당근 줄기 하나도 결코 소홀히 하는 법이 없다. 먹다 남은 와인은 항아리에 부어놓고 한 일주일 기다려 신맛이 강하고 맛있는 와인 식초를 직접 만들어 먹는다.

브루스케타, 마늘 빵 등 간단한 애피타이저부터, 신선한 샐러드, 다양한 파스타와 샌드위치 그리고 고기와 생선 요리들까지. 하나같이 간단하고 쉽게 만들 수 있는 이탈리안식 웰빙 요리이다.

애호박국, 김치찌개, 배추 김치 등의 한식 요리들도 있는데, 그의 손을 거쳐 세계적인 요리로 재탄생했다. 배추를 절인 국물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해 심심하게 담가 샐러드처럼 먹는 아삭아삭한 배추김치와 진하게 우려낸 돼지고기국물로 만든 김치찌개의 맛이 무척 궁금하다.

다른 요리 책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칙피를 이용한 독특한 레시피들도 있다. 지중해 연안이나 남아메리카에서 즐겨먹는 콩인 칙피는 빵에 발라 먹는 스프레드나 스프를 만들어 먹는다. 우리나라 작두콩과 비슷한 맛이라고 하니, 시도해보면 좋겠다.

실제로 그는 책을 만드는 내내 `집에 온 손님이 밖에서 밥을 먹어서야 되겠느냐`며 정성을 다해 환상의 식탁을 직접 차려냈다고 한다. 음악가가 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요리사가 되었을 것이라는 정명훈은 한 순간도 소홀히 지나거나, 호박 꽁지 하나도 허투루 버리지 않았다. 그의 소박함과 겸손함 그리고 질박한 순수에 때론 숙연해지기까지 했다는 편집자의 가슴 벅참이 독자들에게도 깊이 전해질 것이다.

[윤지은 시민기자 wisej@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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