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가 죽자, 고종이 탄식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죽자, 고종이 탄식했다?
  • 북데일리
  • 승인 2007.08.21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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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1909년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탄을 날린 날이다. 갑작스런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 당시 궁궐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창덕궁에서 15년간 순종황제의 측근으로 있었던 ‘곤도 시로스케’의 말에 따르면 "슬픔이 가득했다"고 한다.

이는 그가 직접 들었다는 순종의 말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순종은 “이토 공작이 있기에 한국이 존속할 수 있었다. 지금 공작을 잃었으니 국운이 이미 다하였구나.”라며 안타까워했다.

이와 함께 고종은 뜻밖의 비보에 놀라며 그가 없는 조선의 앞날을 걱정했다. 이후 행해진 일련의 조치는 모두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함이었다. 이를테면 일본 천황에게 자신의 부덕함을 사과하거나, 왕족에게만 내렸던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하사한 것이 그 예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와 친교가 두터웠던 중추원의 김윤식 의장, 궁내 대신 민병석 자작을 많은 부조와 함께 도쿄로 파견해 예를 갖추게 한 사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대한제국 황실비사>(이마고. 2007)에 실린 내용이다. 책은 1907년부터 1920년까지 창덕궁에서 일한 ‘곤도 시로스케’의 회고록을 중심으로 대한제국 황실의 ‘비사’를 엮었다.

하지만 문제는 회고록의 저자가 일본인 이라는 점. 이는 일본인 관리의 편향된 시각이 그대로 들어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책은 ‘역사 바로보기’라는 코너와 상세한 주와 해설을 추가했다. 역사왜곡을 막기 위해서다.

위 사건의 경우 ‘역사 바로보기’에서 황현의 <매천야록> 내용을 덧붙였다. 모든 조선인이‘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애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다음은 <매천야록>에서 묘사한 당시의 일반적 모습이다.

“이 소식(안중근 의사의 의거 소식)이 서울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감히 소리 내어 통쾌하다고 말은 못했지만 만인의 어깨가 모두 들썩하였으며, 저마다 깊은 방에서 술을 따라 마시며 서로 축하하였다.”

이처럼 책은 ‘곤도 시로스케’의 기록이 반드시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의 말이 날조된 사실일 수도 있다는 여지를 주는 것이다. 이렇게 책은 단순한 회고록에서 벗어나 독자가 균형 있는 시각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일제 시대 궁궐의 ‘비화’를 알고 싶은 독자라면 한 번쯤 읽어 볼 만한 책이다. 하지만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점이 있다. 바로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비통한 시기의 ‘비화’라는 점이다. 책 속에 배어있는 슬픔의 무게 때문에 단순히 흥미로만 읽어내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김대욱 기자 purmae33@pi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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