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 명문장] 가난은 우리집 보리밥 소쿠리에 담겨 있었다
[책속 명문장] 가난은 우리집 보리밥 소쿠리에 담겨 있었다
  • 정미경 기자
  • 승인 2015.11.20 04: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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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못 잊을 어머니 손맛> 구활 글 / 이숲

[화이트페이퍼=정미경 기자] 그리운 고향음식 이야기를 전해주는 구활의 <죽어도 못 잊을 어머니 손맛>(이숲. 2010)은 가난한 시절의 일면을 보여주는 음식으로 보리밥을 등장시킨다. 까마득한 옛 시절로 돌아가게 하는 음식이다. 궁상스런 가난의 음식인 보리밥 이야기에 가슴이 먹먹하다.

“우리 집 가난은 보리밥 소쿠리에 담겨 있었다. 그 소쿠리는 비 오는 날만 빼고 부엌 앞에 서 있는 감나무 가지에 늘 걸려 있었다. 누구든지 배가 고프면 소쿠리를 내려서 먹을 만치 보리밥을 덜어 내어 된장에 비벼 먹든지, 아니면 물에 말아 날된장에 풋고추를 찍어 먹든지, 그건 자유였다. 보리밥 소쿠리는 삼베 보자기를 덮어쓰고 긴 여름 해를 견뎠다.

보자기에는 감나무 잎을 갉아 먹은 풀새우 똥이 떨어져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얼른 소쿠리 속의 보자기에서 새카만 환약 같은 똥을 털어 내면서 “에이 씨이…”하고 욕을 퍼붓곤 했다. 그리고 그 욕은 몽땅 우리 집 가난이 뒤집어썼다. 그리고는 대접에 보리밥을 담아 우물가로 갔다. 쌀 한 톨 보이지 않는 보리밥은 찬물에 여러 번 씻어 풀기를 빼버리면 목구멍으로 쉽게 넘어갔다. 보리밥은 씹어 먹는 음식이 아니라 물과 함께 떠내려 보내는 음식이다. 얼마나 낭만적인가. (중략)

보리밥은 쌀밥보다 맛이 없다. 그렇지만 나는 보리밥을 좋아하다. 보리밥은 맛으로 먹는 음식이 아니라 추억으로 먹어야 제맛이 나는 아주 멋진 음식이다. 요즘도 더러 아내에게 푹 삶은 보리밥을 주문하고 다른 반찬은 일절 밥상에 올리지 못하게 한다. 다만, 열무김치와 매운 풋고추를 듬뿍 썰어 넣은 된장 뚝배기만을 앞세우고 자주 고향 여행을 떠난다.” (p.77~p.79)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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