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 명문장] 만화책을 읽는 사람은 죽음을 거부하는 사람
[책속의 명문장] 만화책을 읽는 사람은 죽음을 거부하는 사람
  • 정미경 기자
  • 승인 2015.11.16 08: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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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의미 있는 사물들> 셰리 터클 엮음 장나리아 ․ 이은경 옮김 / 예담

[화이트페이퍼=정미경 기자] 어린 시절, 만화 한 번 읽지 않은 사람은 없을 듯하다. 만화 가게에서 빌려보던 만화책은 물론, 한 달에 한 번 소년지에 연재되던 만화부터 신문에 연재되던 네 컷짜리 만평까지 다양하다. 문학작품과 달리 만화는 한번 손에 잡으면 마지막까지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만화책을 읽는 사람은 죽음을 거부하고, 근원에 대한 향수와 회귀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어른이 되어서도 만화를 읽는 사람들을 보면 “성장이 과거에 멈추었다“고 오해하기도 한다. 소년기에 읽었던 슈퍼맨과 배트맨, 원더우먼 등 슈퍼히어로가 등장하는 만화책과 어머니에 관한 기억을 읽어 보자.

“엄마 침대 곁을 지키는 가족 옆에서 간간히 읽었던 만화책. 만화책과 보낸 시간과 엄마를 보내는 과정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중략)

만화책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엄마와 관련이 있다. 4학년인가 5학년 때였다. 엄마는 열감기로 침대 신세를 지고 있는 나를 위해 코카콜라 시럽을 사러 약국에 갔다. 코카콜라 시럽은 놀라운 치유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이 남부 지역에 전해오는 민간요법이었다. 그때마다 엄마는 가게 중앙의 대형 회전 책꽂이에서 만화책을 잔뜩 골라 들고 오곤 했다. 그래서인지 내게 있어 만화책이란 잠들기 전 노래를 불러주던 엄마의 목소리였고, 이마에 열을 짚어보던 엄마의 손길이었다. 아마도 그런 까닭에 지금도 힘든 순간이 오면 만화책을 찾게 되는 것 같다. (중략)

엄마가 돌아가신 후 며칠 동안 나를 만화책으로 이끈 감정은 향수였다. 향수, 그것을 가리켜 누군가는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던 시간과 장소로 돌아가고픈 애절한 바람이라고 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지금 나의 열망을 과거와 연결해주는 유토피아 판타지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내게 만화책이란 집으로 돌아가는 연휴에 엄마가 만들어준 남부식 야채 요리처럼 위로를 주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엄마가 사라진 세상에서는 만화책도 큰 위로가 되지 못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몇 달 동안 나도 모르게 자꾸 엄마의 마지막 기억을 더듬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천천히 혀를 내밀어 헐거워진 치아를 꾹 눌러보며 아직 아픔이 느껴지는지를 확인하던 어머니의 모습, 왜 슈퍼히어로들이 과거의 슬픔에 그토록 연연하는지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슬픔은 어쩌면 새로운 힘의 원천일지도 모르겠다. 삶의 어느 순간부터인가, 성인으로서 권리와 자유를 누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배우기 위해 만화책을 펼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죽음을 마주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만화책을 펼친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이별의 상처와 상처의 회복이라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과정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어린 시절 읽었던 만화책이 늘 같을 수는 없다. 같은 책을 아무리 여러 번 읽었어도 오늘 당신이 읽은 책의 이야기는 이미 당신 기억 속의 그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읽을 때마다 매번 새롭고 다른 무언가를 발견한다. 나 역시 불사조 슈퍼히어로를 보며 어머니를 보낼 수 있었고, 동시에 어머니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었다.” (p.73~p.88)

<내 인생의 의미 있는 사물들>(예담. 2010)은 다양한 사람들이 사물에 얽힌 기억을 들려주는 수필집이다. MIT의 헨리 젠킨스가 ‘불사조 슈퍼 히어로’에서 들려주는 만화와 엄마에 얽힌 이야기가 옛 추억이 떠오르게 한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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