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 명문장] 바다, 가을의 따사로움, 빛에 씻긴 섬, 그리스
[책속의 명문장] 바다, 가을의 따사로움, 빛에 씻긴 섬, 그리스
  • 정미경 기자
  • 승인 2015.11.12 02: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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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글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화이트페이퍼=정미경 기자] 그리스의 대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열린책들. 2009)는 자유를 찾는 여정이다. 주인공 조르바를 통해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많은 독자가 공감한다. 특히 문장 하나가 곱씹어야 할 만큼 뛰어나다. 책벌레를 벗어나 새로운 생활을 하려고 크레타 섬으로 떠나는 ‘나’. 조르바를 만나기 직전 눈앞에 펼쳐지는 '에게 해' 묘사는 여행의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바다, 가을의 따사로움, 빛에 씻긴 섬, 영원한 나신(裸身) 그리스 위에 투명한 너울처럼 내리는 상쾌한 비. 나는 생각했다. 죽기 전에 에게 해를 여행할 행운을 누리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여자, 과일, 이상……. 이 세상에 기쁨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따사로운 가을날 낯익은 섬의 이름을 외며 바다를 헤쳐 나가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쉬 천국에다 데려다 놓을 수 있는 것이어서 나는 좋아한다. 그곳만큼 쉽게 사람의 마음을 현실에서 꿈의 세계로 옮겨 가게 하는 곳은 없으리라. 꿈과 현실의 구획은 사라지고 아무리 낡은 배의 마스트에서도 가지가 뻗고 과물(果物)이 익는다. 그런 현상이 그리스에서는 필요가 기적의 어머니 노릇을 하고 있는 듯하다.

정오가 가까이 되어 비가 멎었다. 태양은 구름을 가르고 그 따사로운 얼굴을 내밀어 그 빛살로 사랑하는 바다와 대지를 씻고 닦고 어루만졌다. 나는 뱃머리에 서서 시야에 드러난 기적을 만끽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버려 두었다.”(p.26)

아프리카의 불타는 사막에서 지중해로 남동풍이 세차게 불어오는 모습을 표현한 대목도 인상적이다.

“고운 모래 먼지가 꼬이며 하늘로 올라갔다가 다시 목구멍을 통해 가슴으로 불어 들어왔다. 이 사이가 지걱거리고 눈이 매웠다. 모래 세례를 받지 않은 빵 조각을 제대로 먹으려면 문이나 창문은 걸어 잠가야 했다.

그런 계절이 가까웠다. 나무에 물이 오를 즈음의 이들 숨이 막히는 나날을, 나는 봄의 불안에 사로잡힌 채 지내야 했다. 나른한 기분, 가슴속의 정서적인 긴장, 내 몸 구석구석의 근질근질한 가려움, 크지만 단순한 행복의(혹은 추억의) 욕망이 나를 사로잡았다. (중략)

부엉이는 날아올라 조용히 바위 사이를 날다 이윽고 사라졌다. 대기에서는 백리향(白里香) 냄새가 났다. 노랗게 핀 가시금작화의 첫물 꽃이 가시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폐허가 된 소도시가 내 눈에 들어왔을 때 나는 그만 주문에 걸린 듯이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정오 가까이 되었을까. 햇빛이 쏟아져 빛으로 바위를 씻어 내고 있었다. 폐허가 된 도시에서 정오는 위험한 시각이다. 정오의 대기는 망령의 함성과 소란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나뭇가지가 부러져도, 도마뱀이 달려 나가도, 지나는 길 위로 구름이 그림자를 던져도 깜짝깜짝 놀랐다. 밟는 땅마다 무덤이요, 듣는 소리마다 사자(死者)의 비명이었다.” (p.242~p.243)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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