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 명문장] 대낮에도 볕살이 추녀끝에서만 맴돌다...
[책속의 명문장] 대낮에도 볕살이 추녀끝에서만 맴돌다...
  • 박세리 기자
  • 승인 2015.11.11 15: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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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효의 글쓰기 만보> 안정효 글/ 모멘토

[화이트페이퍼=박세리 기자] 그림에는 그림체가 있듯 글에는 문체가 있다. 한마디로 언어의 갖가지 요소를 두루 포함한다. 이를테면 어휘나 구문, 구두법부터 작가의 개별적이고 독창적인 어법 등이다.

<노인과 바다>의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스타카토문체를 가지고 있다. 군더더기 없이 작가의 직선적 성격을 그대로 담는다. 서술이 거의 없는 대화체만으로도 묘사를 끌어내 붙은 이름이다.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모멘토.2006)의 저자는 우리나라에도 헤밍웨이와 견줄만한 문장가가 있다고 말한다. 바로 자연의 서정을 아름다운 문체로 담아낼 줄 아는 <관촌수필>을 엮은 이문구 씨다. 책에서 소개한 <관촌수필1> 중 ‘일락서산(日落西山)’의 한 대목은 시골 풍경화를 보는 느낌이다.

마을 동구 앞에는 조갑지 같은 초가 세 채가 신작로를 가운데로 하여 따로 떨어져 있었다. 한 채는 누깔사탕이며 엿과 성냥을 팔던 송방(松房)으로 불린 구멍가게였고, 주인은 술장수 퇴물인 채씨 부부였다. 그 맞은편 집은 사철 풀무질이 바쁘던 원애꾸네 대장간이었으며, 그 옆으로 저만치 물러나 있던, 댜낮에도 볕살이 추녀끝에서만 맴돌다가 어둡던 옴팡집은 장중철이네가 차린 주막이었다.

부엌은 도가술에 물 타서 느루 팔던 술청이었고, 손바닥만한 명색 마당 귀퉁이는 이발기계와 면도 하나로 깎고 도스리던, 장에 가는 장꾼들만 바라보던 무허가 노천 이발소였다. 주막과 대장간 어중간에는 사철 시커멓게 그을린 드럼통솥이 걸리어 있어, 장날마다 싸잡이 나무를 때어 끓이면서 장으로 들어가는 옷가지나 바랜 이불잇 따위를 염색하던, 검정 염색터가 전봇대 밑에 웅크리고 있게 마련이다. -414쪽~415쪽 중에서

저자는 이 글을 두고 여름밤 외할머니의 느릿하고 구수한 옛날얘기 서술체라 평한다. 빨리 읽으면 미안하고 뒷맛까지 챙겨야 마음이 놓이는 글이라고. 모르는 단어들까지 아는 듯 친근해지는 탓이다. 이어 술청 냄새 풀무 소리와 이발소 거품이 보이고, 전봇대 밑 물이 시커먼 풍경은 여유가 확실하고 넉넉하다 덧붙인다.

그런가 하면 거름 내를 풍기던 흙빛 어휘들도 있다. <관촌수필7>의 ‘여요주서(與謠註序)’의 일부다.

갓 제대한 듯한 머리 짧은 청년이 빈 자전거로 여남은 바퀴씩 돌고, 작정 없이 서울로 뜨기 알맞게 해끔한 처녀 서넛이 고장난 대합실 문짝에 기대어 서서 자전거 타는 청년의 뒤통수를 쫓으며 시시덕거리고 있는 것도 그런 ‘역전앞’이 아니면 냉큼 되살리기가 어려운 저 궁핍한 시대의 추억일 것이다. -416쪽

책은 글쓰기에 관한 기본기를 충실히 설명하며 이처럼 아름다운 문장에 대한 평과 지적까지 두루 실었다. 작가의 40년 내공이 담겼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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