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 명문장] 냄비에선 곤두박질치며 물이 끓었다..가난과 외로움 도종환 시인을 키우다
[책속의 명문장] 냄비에선 곤두박질치며 물이 끓었다..가난과 외로움 도종환 시인을 키우다
  • 정미경 기자
  • 승인 2015.11.09 08: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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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도종환 글, 이철수 그림 / 한겨레출판

[화이트페이퍼=정미경 기자] “학교에서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강둑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쪼그려 앉아 울었습니다.

서정주 시인은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었다”고 노래했는데,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가난함과 외로움이었습니다.” (p.35)

‘접시꽃 당신’으로 유명한 도종환 시인이 산문집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한겨레출판. 2011)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다. 어렸을 때 부터 그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가 그린 만화나 크리스마스카드는 친구들이 돈을 주고 사갈 정도로 실력도 있었다. 하지만 가난 때문에 그림 공부는 생각도 수 없었다. 가난과 외로움, 좌절과 절망, 고통과 두려움의 시간을 거쳐 그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도종환 시인의 아픔과 외로움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대목이 있다.

고등학생 시절 시인은 멸치 장사를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며 저녁 준비를 하곤 했다. 팔다 남은 멸치로 국물을 우려내 수제비를 끓이는 날이 많았다. 어머니가 오실 때를 기다리며 올려놓은 냄비 물. 그 물이 끓고 끓어도 어머니의 귀가가 늦어지는 날이 많았다. 허기에 지친 동생들은 들마루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 때 일을 시인은 ‘수제비’라는 시로 노래했다.

“둔내장으로 멸치를 팔러 간 어머니는 오지 않았다 /

미루나무 잎들은 사정없이 흔들리고 / 얇은 냄비에선 곤두박질치며 물이 끓었다 /

동생들은 들마루 끝 까무룩 잠들고 / (중략)

경기도 어딘가로 떠난 아버지는 소식 끊기고 / 이름 지을 수 없는 까마득함들을 /

뚝뚝 떼어 넣으며 수제비를 끓였다./ 어둠이 하늘 끝자락 길게 끌어 /

허기처럼 몸을 덮으며 내려오고 있었다/

국물이 말갛게 우러나던 우리들의 기다림 / 함지박 가득 반짝이는 어둠을 이고 /

쓰러질 듯 문 들어설 어머니 마른 멸치 냄새가 / 부엌 바닥 눅눅히 고이곤 하였다”

그래도 그때는 팔다 남은 멸치 부스러기를 넣어 끓인 국물에 수제비 정도는 끓여 먹을 수 있었다. 아버지를 찾아 어머니마저 떠난 뒤에는 먹을 양식이 있다 없다 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연탄을 사기도 했지만 그것으로 연명하기는 힘들었다. 저녁을 굶고 학교에 남아 밤공부를 하다 돈을 다 털어 봐도 마련할 수 있는 것이 건빵 한 봉지뿐이던 날도 있었다.

수업료를 안 낸 사람이 혼자라서 교무실에 불려갔는데 언제까지 낼 수 있느냐고 묻는 담임선생님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 줄 수 있는지 물어볼 어머니, 아버지가 옆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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