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사는 어떤 외톨이의 경고
숨어사는 어떤 외톨이의 경고
  • 북데일리
  • 승인 2007.04.26 09: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북데일리]리차드 바크는 그의 유명한 소설 <갈매기의 꿈>에서 꿈을 꾸는 갈매기, 조나단의 삶을 조명한다. 조나단의 꿈은 더 높이 나는 것, 먹이 사냥을 위한 낮은 비행이 상식인 대부분의 갈매기들에게 비웃음만 살 뿐이다. 그 비웃음에도 아랑곳 하지 않는 조나단의 도전. 때문에 <갈매기의 꿈>은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 는 말과 함께 청소년의 필독서로, 끊임없는 자기계발이 요구되는 직장인의 지침서로 여전히 인기가 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비둘기>(열린책들. 2000)를 읽으며 <갈매기의 꿈>을 떠올린 까닭은 제목이 조류라는 공통분모를 가졌고 주인공의 이름이 ‘조나단’으로 같다는 다소 유치한 자유연상의 발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서두에 그것을 언급한 것은 두 소설의 상반된 삶의 모습 때문이다.

우리는 높이 날기 위해, 멀리 보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한다. <갈매기의 꿈>에서 그것은 감동적인 승리로 나타나지만 현실에서의 그것은 뒤처지지 않기 위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알고 보면 현대인은 대가 없이 높은 곳을 향하는 조나단이 아닌, 낮게 날며 먹이에만 욕심내는 갈매기로 살면서, 이를 아름다운 도전이라 착각하며 자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반면, 이런 우리에게 패배자로 낙인찍힌 존재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비둘기>의 ‘조나단 노엘’이다. 소설의 현재 시점으로 50대가 된 조나단의 과거를 돌이켜보면 그의 인생이 우리가 꿈꾸는 혹은 착각하는 이상적 인간상의 것과 얼마나 다른지를 쉽게 알 수 있다. 고아가 된 후의 거처, 군 입대, 결혼과 이별 등, 그는 타인의 지시와 행동에 따라 살아왔다. 대부분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람 구실이라는 명목이 그를 속박한 것이다.

속박에서 벗어나 외톨이의 삶을 찾은 조나단의 시선은 타인이 꿈꾸는 높은 곳이 아닌 자신의 내면으로 치닫는다. 그에게 사회와 그 안의 구성원은 견디기 힘든 존재에 불과하다. 그런 그가 단 하나 소유하고자 했던 것은 단지 방 한 칸, 타인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이었다. 매일 같은 일과를 반복해야 하는 은행 경비원이라는 직업과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마련하는 행위 등은 부가적인 것일 뿐 그는 자신만의 공간에서야 비로소 삶의 가치를 찾는다.

이는 조나단 역시 개인적인 소유욕에서 벗어난 존재는 아니란 뜻이기도 하다. 다만 외부와의 관계를 거부했다는 것이 세상의 인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와 차이를 만들 뿐이다. 무언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가 경제의 기본이자 사회의 틀이 되는 세상을 만든 인간에게 어찌 보면 당연한 소유욕. 조나단 역시 그 소유욕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이것이 역설적으로 소유의 허망함을 알려주는 계기가 된다.

7.5 평방미터의 셋 방. 세월이 지남에 따라 조나단의 방은 그 자신과 동일시된다. 곧 충분히 납부할 수 있는 잔금만 치루고 나면 방은 온전히 그만의 것이 된다. 세입자에서 소유자로의 전환이 조나단의 일상을 뒤바꿀만한 사건은 아니지만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자유를 누릴 생각에 그는 한껏 고무돼있다. 헌데, 불안하다. 그가 바라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 왠지 불안하다. 이 작은 행복 속에 재앙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기만 하다.

재앙의 씨앗은 비둘기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 공동화장실을 가기 위해 문을 열자, 그 곳에 비둘기가 있었다. 하고 많은 방 중에 왜 하필 자신의 방문 앞에 자리를 잡은 것일까. 이런 의문조차 가질 틈 없이 극도로 혼란스러워진 조나단의 머릿속은 이내 절망으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절망은 수순을 밟아나간다.

물론 고작 비둘기 한 마리에서 시작된 혼란이 정신분열로 발전해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모습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조나단이라는 극적인 인물 설정 자체에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소유욕이란 감정에서 그와 우리의 차이가 좁혀지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는 평화의 상징 비둘기가 조나단의 평화를 앗아갔듯 우리의 높은 곳을 향한 꿈은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는 가치에 의해 무너질 수 있음을 말한다. 더구나 우리가 욕심내는 것은 방 한 칸 이상의 것들이 아니던가.

얼마 전 영화로 개봉되었던 <향수>와 <좀머씨 이야기>로 유명한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 그가 타인과의 관계를 거부하며 은둔자의 삶을 살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가 은둔자로 살아가는 이유야 자신만이 알겠지만, 우리 사회가 타인에 대해 간섭하는 것에 개의치 않고 소유하고 있는 물건으로 그 사람의 가치까지 판단해 버리는 무례한 곳이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짐작할 수 있다.

때문에 좋은 옷을 입고, 큰 차를 굴리며, 비싼 집에 사는 것이 ‘갈매기의 꿈’이라 착각하며 사는 우리에게 은둔형 외톨이,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경고는 우리들 앞의 비둘기가 무엇일지 생각하게 하며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

[이광준 시민기자 yakwang79@naver.com]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