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공포도 이겨낸 '책이 주는 즐거움'
전쟁의 공포도 이겨낸 '책이 주는 즐거움'
  • cactus 시민기자
  • 승인 2015.06.17 15: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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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섀퍼의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화이트페이퍼=북데일리]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6년 1월. 런던에 살고 있는 작가 줄리엣은 채널제도 건지 섬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도시’라는 남자에게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편지는 줄리엣이 소장했던 책을 갖고 있다며 작가의 다른 작품을 구할 수 있는 곳을 알려달라는 정중한 부탁이 담겼다. 한 권의 책으로 우연하게 시작된 편지는 계속 이어진다. 소설『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덴슬리벨.2010)의 이야기다.

 새로운 소설의 소재를 찾던 줄리엣은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에 관심을 갖는다. 줄리엣은 ‘도시’에게 독일군이 점령한 건지 섬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는지 그 내용을 글로 써도 좋은지 묻는다.

 북클럽 회원들은 하나 둘 줄리엣에게 편지로 저마다의 사연을 들려준다. 그 중심엔 간호사였던 엘리자베스가 있었다. 섬 주민의 생활과 식량을 통제하던 독일군을 피해 돼지구이 파티를 열었다. 모임이 끝나고 돌아가던 중 통금에 걸리자 엘리자베스가 독일군에게 문학회라고 둘러댔다. 그렇게 시작된 독서모임이 진짜가 된 것이다. 작은 섬 주민의 평범한 일상은 전쟁으로 붕괴되었지만 독서모임을 통해 서로를 위로한다. 책이 주는 재미와 즐거움으로 외부와 단절된 5년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소설은 도시와 줄리엣이 주고받은 편지처럼 섬사람들과 줄리엣이 주고받은 편지는 전쟁 당시의 상황과 그들이 읽은 책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에 대해 진실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존재한다는 건 정말 기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책에는 관심조차 없던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책을 만났으니 이토록 즐거운 이야기가 어디 있을까. 이를테면 이런 부분.

 ‘제가 고른 책은 《셰익스피어 선집》이었습니다. (중략) 제가 보기에는 그는 말을 아낄수록 더 많은 아름다움을 창조해내는 것 같습니다. 제가 가장 찬탄하는 문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밝은 날이 다했으니 이제 어둠을 맞이하리라.’ 바로 이겁니다. 독일군이 상륙하던 날에도 이 문장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들을 실은 비행기가 연달아 오고 부두에도 배가 쏟아져 들어오는 걸 바라보던 그때 말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빌어먹을 놈들, 빌어먹을 놈들 하고 속으로 되뇌는 것뿐이었습니다. ‘밝은 날이 다했으니 이제 어둠을 맞이하리라’라는 문장을 떠올릴 수 있었다면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고 밖으로 나가 상황에 맞설 준비를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심장이 신발 아래로 가라앉듯 축 처져 있을 게 아니라요.’ (99~100쪽)

 직접 만날 수 없지만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줄리엣과 사람들은 점점 가까워지고 결국 줄리엣은 건지 섬을 방문한다. 소설을 위한 자료 조사가 표면적 목적이었지만 줄리엣은 그들의 삶을 만나러 온 것이다.

 누군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잔혹함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섬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느끼는 전쟁의 공포는 짐작할 수 없으니까. 그러나 내게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작가 줄리엣과 도시의 연애소설로 읽혔다. 둘을 이어준 한 권의 책과 함께 말이다. 주인공 줄리엣이 작가가 아니었더라도 편지로 시작된 우정은 사랑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한 내밀한 고백으로 편지만큼 좋은 방법은 없으니까. 나만을 위한 편지를 받은 것처럼 아름답고 황홀한 소설이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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