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 불온- 파격' 3색 사랑
'은밀- 불온- 파격' 3색 사랑
  • 정미경 기자
  • 승인 2014.08.27 14: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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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의 <소소한 풍경>

[북데일리] 우리 시대의 ‘영원한 청년작가’ 박범신. 그가 ‘갈망의 3부작’ <촐라체>, <고산자>, <은교>와, <비지니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소금>을 통해 ‘자본주의의 폭력성을 비판한 3부작’ 이후 새로운 형식의 장편소설 <소소한 풍경>(자음과모음. 2014)을 썼다. 소설은 선인장 ‘가시’처럼 저마다 가슴에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느 날, 화자이자 소설가인 ‘나’는 제자 ‘ㄱ’으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는다. 그녀는 대학 신입생 시절 작가를 꿈꿨으나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해버렸다. 어려서 하나뿐인 오빠와 부모를 잃었고, 지금은 이혼해 혼자 ‘소소’시에 내려와 살고 있다.

겨울의 초입, 집주인에게 억울하게 내쫓긴 남자 ‘ㄴ’을 발견한 ㄱ은 그를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한다. 둘은 함께 하며 차츰 서로의 존재에 만족감을 얻게 된다. 그녀는 지금까지 ‘혼자 사니 좋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둘이 사니 더 좋다‘고 느낀다. 하지만 커다란 더플백 하나를 가지고 들어온 그는 언제든 떠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혼 후 ‘돌 같은 정적’을 가장 좋아했던 ㄱ은 ㄴ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

“‘섹스’가 아니라, ‘덩어리’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다. 나-그는 때로 ‘덩어리’가 된다. 나-그 사이의 정적, 나-그의 몸뚱어리 속 가시가 훼손되지 않도록 하자는데 암묵적인 동의를 전제한 ‘덩어리 되기’였다고 생각한다. 소유하지 않고 덩어리를 이루는 법을 우리는 알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덩어리로 인한 어떤 소음도 발생하지 않는다. 피차 생의 가시를 촘촘히 내장하고 있었으므로.” (p. 84)

둘은 시장에서 삽을 사오고, 그날부터 ㄴ은 ㄱ의 집 뒤란에 샘을 파기 시작한다. 그것은 ㄴ이 한동안 ㄱ의 집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물이 완성될 즈음 ‘ㄷ’이 그들 집을 찾아온다. 어느덧 그들 셋은 덩어리지듯 서로에게 뒤섞여든다. ㄱ은 또 생각한다. “셋이 사는 것도 참 좋네!”

ㄴ의 우물 파기가 완성된 날 저녁, 셋은 축제를 벌인다. 다음 날 아침, ㄱ은 우물 앞에 앉아 있는 ㄴ을 발견한다. 그런데 다음 순간, ㄴ은 사라지고 ㄷ 만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이후 소설은 형과 아버지가 1980년 5월 광주에서 죽고 평생을 떠돌이로 살아온 남자 ‘ㄴ’과 어렵사리 남한에 오게 된 탈북자 처녀 ‘ㄷ’의 입을 통해 그들의 사연을 들려준다.

어찌 보면 이들이 각자 처한 모습은 책 제목처럼 소소한 풍경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아주 불가사의하고, 슬프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더 나아가 소설은 일반적인 사랑의 형태에서 벗어나 은밀하고 불온하며 파격적인 내용으로 독자를 당혹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달하기 힘든, 누구나 한번쯤은 꿈꾸는 사랑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작품이다. 책을 덮고 나면 시인의 주문대로 서사 ‘시집’을 한권 읽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아직도 ‘글쓰기의 우물은 무궁무진하다’는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정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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