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위를 미끄러지는 달팽이
시간 위를 미끄러지는 달팽이
  • 장맹순 시민기자
  • 승인 2014.07.28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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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림 시인의 <그림자 보관함>

 "오후를 지나는 중인가요?/ 기다란 목덜미가/ 여유롭군요/ 이 시간이면/ 어김없이 우리의 시선이/ 마주 치죠/ 당신은 그저 나의 남쪽 창을/ 지나치는 중이었을 텐데요."(칸나)부분
 
[북데일리] <그림자 보관함>(문학의 전당.2014)은 이은림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 나왔다. 시집 <태양중독자>이후 9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중독자에서 관찰자로 돌아왔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인물과 사건, 사물을 시 안에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그 안에서 현실 속 '나' 를 본다. 시인의 자연스런 본성이 관찰자로서의 세계를 보여준다.
 
"때로는 돌아눕고 싶었네/ 먼저 달아난 마음이 자꾸만 뒤돌아보며 어서 오라 재촉할 때 / 손바닥 위를 오래 흐르던 강물이 제 몸 접고 얼어버렸을 때/ 밤은 밤을 부르고 / 밤이 밤을 낳고/ 그렇게 끝도 없는 어둠 속을/ 긴 여행 떠나는 철새 행렬이 우수수 쏟아 놓은 그림자떼/ 길은 낙타처럼 쓸쓸히 늙어가고/ 먼 산 바위의 등에는 배고픈 새들이 집 짓고 사네/ 나는 또 /내가 만든 벽 속으로 등 돌려 숨고."(달팽이의 노래)전문
 
 시에 나타난 자연의 사물은 '나'보다 큰 존재이면서 때로는 '나'다. 존재에서 존재를 투영하는 방식은 바라보고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시인은 시간 위를 미끄러지는 달팽이란 존재에서 삶을 살아내야 하는 자신을 본다. "내가 만든 벽속으로 등 돌려 숨"지만 축축하고 어두운 시간의 허공 속에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받아들인다.
 
 “떨어진 나뭇잎은/ 어쩌자고 다시 생겨나는가/ 헛소문처럼 부푸는 열매들/ 언젠가 닿아야 할 곳 인줄 알면서/ 왜 그토록 흙에서/ 멀어지려 발버둥 쳤던가/ 결국에는 묵직해지고 마는 구름들/ 사흘 후면 당신은 과묵한 익사체/ 흔들의자가 할 일은 그저 흔들흔들 앞으로 뒤로 움직여 주는 것/ 당신의 흔들의자들 먼발치에서/ 사흘 동안 지켜보는 것은/ 과연 서녁 하늘 언저리 입었던 옷 죄다 벗어던지는 저 붉은 것/ 다시 돌아올 길을 어찌하여/ 알몸으로 떠난다는 것인가."(끝없는 사슬)전문
 
 시인에게 현실은 '나'의 몸 밖이며 몸 안이다. 나를 통해 보고 나를 통해 대상에게 다가간다. 이러한 과정은 자연스럽고 차분하다.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들여다보기'의 과정을 마친 달관자가 되어 누에가  비단 실을 뽑아내듯 제 몸 안에서 따스한 시편들을 길어 올린다. 그것이 마치 시인만의 존재방식이라도 되는 듯이. <장맹순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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