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의 귀밑머리가 젖어있다
사월의 귀밑머리가 젖어있다
  • 장맹순 시민기자
  • 승인 2014.06.25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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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 시집<지금 여기가 맨 앞>

[북데일리] 이문재 시인이 10년만의 침묵을 깨고 다섯 번째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2014)을 들고 나왔다. 이번 시집엔 모두 85편의 시가 실려 있다. 이 침묵은 시인이 지난 세월을 통과한 고독과 진실이며 조금은 낯설고 낯익은 이야기다.
 
 사막에 모래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모래와 모래 사이다/사막에는/모래보다/모래와 모래 사이가 더 많다/모래와 모래 사이에/사이가 다 많아서/모래는 사막에 사는 것이다/오래된 일이다.('사막)전문
 
 모래가 지천인 사막에서 모래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니 무엇일까. 시인은 모래와 모래 사이를 본다. '사이'라는 말은 '틈'이라는 공간을 허용하는 말이다. 그 틈 이 모래보다 더 많다는 것이다. 사막이 존재하는 건 사이와 사이, 틈이 있기 때문이라는 시적 발상이 신선하다.
 
 사월의 귀밑머리가 젖어있다/밤새 봄비가 다녀가신 모양이다/연한 초록/잠깐 당신을 생각했다/떨어지는 꽃잎과/새로 나오는 이파리가/비교적 잘 헤어지고 있다/접이우산 접고/정오를 건너가는데/봄비 그친 세상 속으로/라일락 향기가 한 칸 더 밝아진다//(중략)미간이 순해진다/멀리 있던 것들이 /어느새 가까이 와 있다/저녁까지 혼자 걸어도/유월의 맨 앞까지 혼자 걸어도 오른 켠이 허전하지 않을 것 같다/당신의 오른 켠도 연일 안녕하실 것이다.('봄편지')전문
 
 밤새 봄비가 오고 세상은 초록이다. 시인은 연한 초록을 보며 헤어진 연인을 생각한다. 그것도 잠깐이다. 꽃잎이 떨어지고 그 자리에 새 이파리가 나오는 것을 보며 시인은 두번째 헤어짐을 이해하려고 한다. 라일락 향기가 한 칸 더 밝아 진다'는 후각의 시각화한 표현이 빛난다.
 
 은어 떼 올라온다는데/열나흘 달빛이 물길 열어준다는데/누가 제 키보다 큰 투망을 메고/불어나는 강가에 서 있는데/물그림자만 만들어놓고 나무들 잠들어/북상하던  꽃소식도 강가에 누웠는데/매화 꽃잎 몇 장 잊었다는 듯/늦었다는 듯 수면으로 뛰어 드는데/누군가 떠나서 혼자 남은 사람//(중략//휘익 그물을 던지는 것인데/공중에서 끝까지 퍼진 그물이/여름 꽃처럼 만개한 그물이/순간 수면을 움켜쥐는 것인데/움켜쥐자마자 가라앉은 것인데/시린 세모시 치마 한 폭/물속에 잠기는 것 같았는데/달빛도 뒤엉켜 뛰어드는 것 같았는데/은어 떼 다 올라간 봄날/누군가 돌아오지 않아 /내내 혼자였던 사람/투망에 걸려 둥실 떠올랐다는데.('달밤')부분
 
 이 두 편의 시는 봄 낮의 이별과 봄밤의 이별을 노래한다. <봄 편지>가 연인과의 싫은 이별을 애써 달래며 자기 위안을 삼았다면 <달밤>은 도저히 헤어질 수 없어 연인을 따라 달빛 속으로 몸을 던진다. 늦봄에 투망에 걸려 올라온 장면은 죽음으로서 작별을 고한다. 이 시집의 평론을 쓴 신 형철 문학평론가는 "봄에 작별을 가장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이 '중년성'의 한 본질이라고 평했다. 
 
 나무는 끝이 시작이다/언제나 끝에서 시작 한다/실뿌리에서 잔가지 우듬지/새순에서 꽃 열매에 이르기까지/나무는 전부 끝이 시작이다/지금 여기가 맨 끝이다/나무 땅 물 바람 햇빛도 /저마다 모두 맨 끝이어서 맨 앞이다/기억 그리움 고독 눈물 분노도/꿈 희망 공감 연민 연대도 사랑도/역사 시대 문명 진화지구 우주도/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 지금 여기 내가 정면이다.('지금 여기가 맨 앞)전문
 
 이 시는 제목과 반대의 문장으로 시작 된다. '끝'이라는 말은 절망이나 종말을 상기시키지만 시인은 결코 그렇지 않다. 나무의 섭리에서 '시작' 을 본다. 실뿌리와 잔가지에서 새순이 나오고 꽃이 피는 시작은 희망으로 살아갈 현재다. 시는 대체로 어렵지 않지만 결코 쉽게 읽을 수 없다. 시의 말과 나의 말이 다른 것일까. 시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달라서일까. 좋은 시는 읽을 때마다 알았던 것조차 모르게 만들어 버린다. <장맹순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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