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그 불편한 진실을 말하다
'관계' 그 불편한 진실을 말하다
  • cactus 시민기자
  • 승인 2014.05.28 23: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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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조의 첫 소설집 <수박>

 [북데일리] 먹음직스러운 수박에 침이 고인다. 한데 수박에 꽂힌 수저 하나가 외롭게 보인다. 이은조의 소설집 <수박>(작가정신. 2014)속 인물은 모두 수저처럼 외롭다. 소중한 사람이라고 믿었던 가족, 연인, 친구의 관계에서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표제작 「수박」은 고교 졸업 후 가족을 위해 직장 생활을 하는 ‘난주’ 의 이야기다. 사고를 치는 오빠와 돈타령이 끊이지 않는 엄마를 위해 난주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다.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했지만 생활은 달라지지 않는다. 올케와 조카까지 돌봐야 할 지경이다. 남편 뜻대로 형편이 좋아지면 아이를 갖기로 결정했지만 8년 동안 한 번도 피임을 한 적이 없었다. 거리를 헤매던 난주는 수박 한 통을 사 들고 남편과 사랑한 맹세한 도시로 향한다. 8년 전 가보지 못한 절 근처 노점에서 한 노파와 마주한다. 함께 수박을 먹으며 노파의 이야기를 듣는다. 마치 고단한 난주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노파의 목소리는 수박처럼 달콤하다.

 “수박씨는 꼭 뱉어내야 돼. 가슴에 담고 있으면 안에서 수박이 열린다고. 씨가 있다고 수박을 안 먹으면 미련한 거지. 씨앗은 뱉으면 돼. 그냥 툭, 툭……”

 “수박이란 넘이 그래. 겉만 보면 이게 무겁기만 하고 무슨 꿍꿍이 속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없어. 이렇게 속이 빨갛고 단맛이 있을 거란 상상이 잘 안 되지.” (「수박」, 91쪽)

 겉과 속이 다른 게 어디 수박뿐일까. 살을 맞대고 자는 남편, 나를 낳아준 엄마의 속도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내 맘에 수박씨를 키우면 아무도 알 수 없다. 관계란 그렇다. 나와 상대가 모두 열려 있어야만 유지되는 것이다. 가족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난주가 꿈꾼 행복은 「비자림」의 화자 ‘나’의 꿈과 닮았다. 나는 신혼여행지였던 제주도를 다시 찾는다. 함께 오기로 한 남편이 공항에서 사라져 혼자 제주도에 도착한다. 비자나무를 바라보면서 남편과 자신의 결혼 생활을 돌아본다. 피아노 강사였던 나는 수강생이었던 남편을 만나 결혼에 이른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단란한 삶을 꿈꾸지만 남편은 달랐다. 자유롭게 자란 아와 달리 남편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포기한 그림이라는 꿈을 찾겠다며 떠나라 말한다. 그러나 나는 비자림에서 새로운 관계를 발견한다. 덩굴과 떨어질 수 없는 비자나무처럼 자신도 남편에게서 떨어질 수 없다는 걸 말이다.

 ‘비자나무와 덩굴이 기가 막히게 평행선을 유지하고 있는 걸 봐요. 쟤들은 서로한테 덤벼드는 게 없어. 덩굴이 제 속으로 파고들면 비자나무는 제 땅까지 내줄 거야. 그건 덩굴도 마찬가지야. 평행선은 결코 한 지점에서 만나지 않지. 선 하나가 기울이기만 해도 그건 평행선이 아니니까. 그래서 비자나무는 죽을 거야.’ (「비자림」, 142쪽)

 어쩌면 우리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기에 서로에게 소홀하게 대하는지도 모른다. ‘친구’, ‘가족’, ‘부부’라서 괜찮다고 위장하는 것이다. 작가는 그 위장이 얼마나 위태로운지「전원주택」에서 잘 묘사한다. 누구나 바라는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왔지만 행복한 삶은 없었다. 주말마다 찾아오는 지인과 가족을 거부할 수 없어 그들을 위한 전원주택으로 전락한다. 집안을 청소하고 텃밭을 가꾸던 ‘나’는 무엇을 위해 그 이유를 찾을 수 없다.

 근사하게 보이는 전원주택은 행복한 삶을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 진짜 행복이 아니었다. 관계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진심이 아닌 가식과 의무라는 장치로 이어가는 관계는 무의미할 뿐이다. 저마다 수박씨를 품고 있다면 관계를 달라지지 않는다. 이제라도 수박씨를 뱉어 진정한 관계의 싹을 틔워야 한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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