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집에는 세가지가 없다
이 시집에는 세가지가 없다
  • 장맹순 시민기자
  • 승인 2014.05.25 10: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준규 시인의 네번째 시집<네모>

[북데일리] 문장, 네모, 빛, 얼굴, 봄, 꽃마리, 등대, 해, 잔, 고양이, 창가, 고개, 우기, 골목, 침대, 마루, 아버지, 황조롱이, 매미, 달개비꽃, 구두,....

이 단어들은 이준규 시인의 네 번째 시집 <네모> (문학과 지성사.2014) 각 시편의 제목들이다. 이번 시집은 5음절 내의 짧은 제목 짧은 줄글로 씌어진 72편의 산문시다. 시집엔 특이하게도 3無가 있다. 내용, 형식, 수사가 그것이다. 담백한 시편마다 단순하되 빠르게 전개된다.

"공터가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공터의 끝에 교회가
있었다. 교회의 뒤로 테니스장이 있었다. 테니스장 옆에
는 밭이 있었다. 비닐하우스도 있었다. 그곳은 겨울이면
스케이트장이 되었다. 조금 떨어져 도로가 있고 도로 위
에는 육교가 있었다. 공터의 다른 끝에는 아파트가 있었
다. 해가 지고 있었다. 공터의 가운데에 트램펄린이 있었
다. 해가 지고 있었다." (트램펄린) 전문

시인은 말을 아낀다. 그만큼 감정도 절제 돼 있다. 사물들의 존재를 짧게 진술할 뿐이다. 시구마다 '있었다' 로 반복되는 진술은 존재함과 동시에 소멸의 조짐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풍경 또한 미완성이다.

"쓰레기차가 왔다. 고양이가 울었다. 새가 울었다.
해가 떴다. 너의 뒷모습을 보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너의 뒷모습을 보았다. 너는 고개를 돌렸다 너는 고
개를 돌리고 거꾸로 갔다. 나는 너의 뒷모습을 보았
다. 나는 너의 뒷모습을 자꾸 보았다. 그날 변소 앞
의 꽃은 꽃마리였다. 나는 너를 외우지 않았다. 나는
너를 외울 수 없었다." (꽃마리) 전문

시인은 무심히 말하고 세계는 지나간다. 고양이와 새의 울음소리도 끊긴다. 시인은 보여주기로 일관한다. "나는 너의 뒷모습을 자꾸 보았다." 에서 잠시 여운을 비춘다. 끝까지 말을 아끼는 것은 여백의 의미를 되짚어 보라는 걸까.

"아이들이 개나리 아래를 뛰어간다. 아이들은 노
랗다. 그는 창문을 열고 봄의 소리를 듣는다. 봄의
작고 큰 소리. 벚꽃은 바람에 날려 바닥에 쌓인다.
아스팔트가 푹신해지고 부드러워지고 흐른다. 아
이들은 개나리 아래로 달렸고 고양이와 까치는 자
신들의 움직임을 움직였다. 마치 자신들의 그림자
를 조금 떼어주는 것처럼." (봄) 전문

개나리와 뛰어가는 아이들, 봄의 소리와 바람에 쌓이는 벚꽃, 고양이와 까치, 전혀 감정 개입 없이 거리두기를 했던 풍경들이 살아나고 있다.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는 건 무엇일까. 뛰어간다, 듣는다, 쌓인다, 는 내면적인 풍경의 발견이다. 여백과 여백에 배치된 시어들은 담백하되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다.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저녁이 온다. 몇 개의 문
장을 더 쓰면 밤이 오고 겨울이 오고 봄이 온다. 너
는 웃고 나도 웃고 몇 개의 문장을 더 쓰고 어둠이
오면." (문장) 전문

시집의 서시에 해당하는 시다. 시인은 " 몇 개의 문장을 더 쓰" 는 것을 반복함으로써 시간의 흐름을 보여준다. 어둠을 예감하는 최후의 문장에서 아릿한 울림을 전한다. 이것도 슬픔에 속할까. 시집에 수록된 72편의 시들은 따로 또 같은 쓸쓸한 퍼즐 조각이다. 그것들이 어우러져 한 편의 시를 이루고 72편의 각기 다른 시가 된다. 그림 퍼즐을 맞추니 비로소 보이는 풍경처럼.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