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마다 행복을 피워 올렸다
굴뚝마다 행복을 피워 올렸다
  • 장맹순
  • 승인 2014.04.25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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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권 시집 <그러나 더 먼 곳>

"분주한 까치 곤한 농부 단잠 깨우고/ 밤새 선잠 잔 누렁이/ 기지개키며 컹컹거리는 소리/ 뒷짐 진 수탉 힘차게 목청 돋우고/ 황토색 어미 소/ 외양간 나간 송아지 불러들이는 소리/ 부엌 아궁이 삭정이 태우며/ 구수한 보리밥 익는 소리/그 소리들.( '그리운 소리') 부분

[북데일리] '그리움'이라는 말은 물안개 같다. 아련하게 피어올라 사람의 마음을 촉촉하게 한다. 이 영권 시인의 시집 <그러나 먼 곳> (문학의 전당. 2014) 이 그렇다. 시의 풍경은 그리움이다. 고향과 어머니를 그린 시편들은 한 폭의 수채화 같다.

"찬란했던 봄도 흐르고 흘러 예까지 왔구나./ 아버지 어깨가 까마귀 날개처럼 흐느낄 때/ 부엌에서 옷고름 훔치는 어머니를 보았지/우린 삶은 무논에서 올미를 캐서/까만 껍질 속 하얀 맛으로 허기를 채우고/ 해 저물면 논두렁에 빠진 산그늘 밟으며 돌아와/ 언젠가는 피어날 꿈처럼 굴뚝마다/한가로운 행복을 피워 올렸다." (가을나무 한 그루)부분

"살아간다는 것은/ 명주 몇 필 짜서 내 몸에 걸치고/ 나무상자에 누워 흙집으로 들어가는 것 / 가까운 것은 멀어지고 /멀리 있는 것은 더 멀어지고/ 나도 그렇게 멀어져 가는 것/ 가까운 것은 내 곁에 두고/ 멀리 있는 것은 끌어당겨/ 더 멀리 있는 것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 ('그러나 먼 곳')부분

시는 무리 없이 읽힌다. 추억을 불러내 현재라는 거울에 비추기 때문이다. 시는 장년이 되어 궁핍했던 시절을 회상하거나 베틀에 앉아 명주를 짜던 어머니를 기억하면서 지나간 시간을 안타까워한다. 속내를 감추지 않았기에 그것이 다 보인다. 이처럼 1부~2부의 시들은 그리움으로 채워져 있다. 3부~4부는 교사로서의 삶의 애환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벨이 울리면 의자가 나를 밀친다./ 출석부가 나를 집어 들고 교실이 나에게로 온다./ 책이 나를 펼치면 나는 삼류급 모노드라마 배우가 된다 무대에 서면 나는 페스탈로치가 되고 히틀러가 되고 하얀 얼굴의 드라큘라가 된다/ 계백이 되고 연산군이 되고 가증스런 일본 순사가 되고(...) 희망 없는 시간, 벨이 울릴 때까지 모노드라마는 계속 되어야 한다./요즈음은 이렇게 아이들이 나를 가르친다./ 나는 배울 자세가 되어 있고 아이들은 나를 가르칠 자세가 되어 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책이 나를 덮고 출석부가 나를/들고 문이 나를 열어 교실이 나를 밀어낸다./이것은 참 엽기적이다."('교실이 나에게로 온다') 부분

앞에 시편들이 시인의 과거였다면 뒤 시편은 현재의 모습이다. 시편마다 드러나는 현실은 시인의 맨얼굴이다. 교사로서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고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의 갈등이 여실히 드러난다. "끊임없는 시간은 바람처럼 지나가고. 느티나무에도 낙엽은 지는데"처럼 현실은 적나라하다. 그 절절함은 "봄은 또 오리라 그때는 부쩍 자란 모습으로 새로운 얼굴들을 보리라."(교문단상1)다. 독자에게 쉬운 시는 편안하게 읽히지만 13년 만에 첫 시집을 낸 시인은 이런 마음이 아닐까!

“나의 시는 지퍼가 없어 내 보일 수 없는 가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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