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속을 걸으며 듣는 경이로운 소리
침묵 속을 걸으며 듣는 경이로운 소리
  • 정미경 기자
  • 승인 2013.05.10 1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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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 명문장]<러셀 베이커 자서전 : 성장>중에서

[북데일리] 한낮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 덕분에 나른함이 몰려온다. 분주한 도시에서는 느끼기 힘든 시골 마을의 한낮 풍경 묘사가 인상적이다.

<러셀 베이커 자서전 : 성장> (연암서가. 2010)은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쓴 회고록이다. 힘들고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어린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가슴 따듯하고 뭉클함을 전해준다.

어린 소년에게 시골마을 ‘모리슨빌’은 즐거운 유년을 보내기 좋은 곳이었고, 19세기 전원풍의 소년기를 누릴 수 있던 곳이었다.

“남자들이 모두 일터로 나간 뒤 여자들이 잠깐 낮잠에 드는 오후가 되면 나는 뙤약볕을 쪼이며 깊고 경이로운 침묵 사이를 걸었다. 침묵은 너무나 깊어 옥수수가 자라는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었다. 침묵이 흐르는 중에도 자연의 오케스트라는 도시 아이들이 결코 들어보지 못할 음악을 연주했다.

닭장에서 꼬꼬댁 소리가 들리면 그건 닭이 알을 낳았다는 신호였다. 처마 아래 매달아 놓은 작은 그네가 삐걱삐걱 소리를 내면 그건 산들바람이 할머니 집 뒤뜰을 지나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리즈 버츠 씨네 마구간 앞을 인디언마냥 잽싸게 지나가다 보면 말이 파리 떼를 쫓기 위해 꼬리를 휘젓는 소리가 들렸다. 이낀 낀 개울가에서 발끝으로 살금살금 개구리에게 다가갈 때 퐁당 소리가 들리거든 그건 개구리가 사냥꾼을 발견하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는 신호음이었다.

낮잠에 빠진 집들 사이를 지나며, 나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양철 지붕들이 딱딱 소리를 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녹초가 되어 할머니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거실 바닥에 길게 누워 똑딱똑딱 시계추 소리를 들으며 최면에 빠지듯 잠이 들곤 했다.” (p72)

옥수수가 자라는 소리, 산들바람이 뒤뜰을 지나가고 있는 소리, 뙤약볕에 양철 지붕들이 내는 소리. 침묵에 빠진 나른한 시골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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