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조선, 놀라운 장애인 보호정책
19세기 조선, 놀라운 장애인 보호정책
  • 북데일리
  • 승인 2005.09.02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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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조선사회는 급격한 변화의 중심에 서 있었다.

농업기술이 발전되고 개인무역이 증가했으며 전통적인 신분 질서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근대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이 들끓었으며 제국주의 열강이 수시로 조선 사회를 넘보던 때였다.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전반에 걸쳐 혼란과 변화가 일었고 이는 서민 생활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일부 지방에서는 여자가 장터에 나가 상인과 직접 흥정을 벌이는 모습도 종종 목격되거나 목축과 밭일까지 거뜬히 해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세기 조선, 생활과 사유의 변화를 엿보다`(2005. 돌베개)는 조선 헌종 때의 재야지식인이자 철학자로 알려져 있는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를 기본으로 조선의 생활과 문화를 분석하고 있다.

이규경은 그의 조부가 실학자 이덕무였고, 아버지가 정조 때 규장각에서 검서관(檢書官)을 지냈던 이광규였다는 것 외에는 그의 생애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책을 펴낸 주영하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를 비롯한 공동 저자 4인은 "이규경이 펴낸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우리나라와 중국을 비롯한 각 나라의 생활상을 1천4백여 항목에 걸쳐 고증하고 해설한 책으로 19세기의 조선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자료"라고 설명한다.

책은 "모든 것을 변증하라"고 말했던 이규경의 주장대로 의학과 신체에 대한 연구와 조선 후기의 의생활, 세시풍속에 대한 인식, 조선 후기 시각 장애인의 삶등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이규경은 무엇보다 건강한 몸과 마음에 대해 강조했는데 "나이 80이 되어서도 등불 밑에서 2~3천권의 책을 썼던 심인사의 삶이나 쌀알 한 알에 글씨를 쓰고 오이씨 한 개에 그림을 그렸다던 축옥성의 생이 부러웠다"고 적고 있다.

또 섭생과 양생론을 적은 `생활훈`을 통해서 건강한 인생을 영위하기 위한 생활지침을 계절과 시간별로 정리했으며 항상 몸과 마음을 깨끗이 비우고 명예를 탐하지 않는 삶을 권장했다. 이는 이규경 자신뿐만 아니라 당시 양반가에서 절실히 목말라했던 삶이기도 했다.

봄에는 새벽에 일어나 매화차를 마시고 정오에는 죽순과 고사리를 캔 다음 땅거미가 질 무렵 샘물을 길어와 새로 나온 차를 끓여 마신다.

여름에는 새벽에 일어나 꽃나무 옆에 앉아 이슬을 받아 마심으로써 폐장의 기운을 돋게 하고 해가 지면 온천에서 목욕을 한 뒤 조각배를 타고 낚시를 즐긴다.

가을에는 새벽에 일어나 휘장을 내리고 서책을 점검한 다음 오후에 단풍잎을 관전하고 새로운 시구를 얻어 잎사귀 위에 써본다.

겨울에는 새벽에 일어나 좋은 막걸리를 마신 다음 양지에 앉아 머리를 빗는다. 정오에는 발을 씻고 미루어진 원고를 정리한 다음 해그림자가 층계를 옮겨갈 즈음에 화롯가에 앉아 토란을 구워 먹고 무념무생(無念無生)의 삶을 이야기한다. (본문 중)

이규경은 "자식을 많이 낳게 되면 부모가 힘써 양육과 출가를 책임져야 하고 아침에 일어나 문안을 받을 때도 누가 누구인지 얼굴을 알아보기 어렵고 그 이름조차 외우기 힘드므로 자식은 둘이나 셋있는 것만큼 좋지는 못하다"라고 역설했다.

또 우리나라의 지도를 허리가 굽은 노인이 옆으로 서 있는 것과 같다고 하는 등 인체를 땅과 곧잘 비유했다. 인체 중 머리는 군주에, 팔다리와 배, 가슴은 신하에, 살과 뼈는 부자(父子)에, 혈과 맥은 조손(祖孫)를 인간 관계와 빗대어 생성과정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밖에 조선 시대의 시각 장애인의 삶은 일반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각장애인은 일차적으로 가족과 사회공동체의 책임. 다양한 구휼(救恤)정책을 다양하게 폈던 국가는 이들에게 세금을 면해 주고 장애인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경우 해당 관청이나 사람에게 처벌을 내렸다.

시각장애인들은 점술과 악기 연주 등을 통해 생계를 꾸려나갔다. 한쪽 눈만 성한 경우, 별다른 차별 대우를 받지 않고 능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벼슬 자리로 나갈 수 있었다.

당시 의복 소재는 면과 마가 주로 사용되었다. 견은 수입에 의존했고 모는 의복으로 많이 사용되지 않았다. 여자들의 저고리는 길이가 짧고 몸에 꽉 끼었으며 치마는 풍성하게 입었다. 이같은 복식의 형태는 기녀들의 복장에서 쉽게 볼 수 있었는데 점차 양반가의 여인네들도 따라입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의복은 점차 화려해졌으며 일반 여염집에서도 궁중의 복식을 답습하는 모습이 많이 비춰졌다.

공동 저자 4인은 "이규경의 문집은 과거를 탐구하고 현재를 서술하며 미래를 예측하는 변증덩어리로서 그가 살다 간 시대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는 중요한 사료다"라고 강조했다.

또 "이규경은 자신의 사고를 틀에 맞게 정형화시키기 보다는 사소하지만 다양한 문물들에 대해 애정을 가졌기 때문에 그가 펴낸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가치가 더욱 빛난다"라고 덧붙였다.

(사진 = 1. 표지 2. 오주연문장전산고 3. 19세기와 20세기 초 조선의 이미지를 담은 `조선에서 온 사진엽서`) [북데일리 정문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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