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철학의 편견과 대립을 넘다
동-서 철학의 편견과 대립을 넘다
  • 북데일리
  • 승인 2005.08.12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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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사람들은 예로부터 술에 취함으로써 도달하는 자연에의 합일(合一)과 무욕(無慾)의 경지에서 삶의 낭만을 찾았다. 때문에 동양의 이름난 시인 치고 이 취기(醉氣) 어린 풍류를 노래하지 않은 이가 없다.

가깝게는 우리 나라의 ‘천상 시인’ 천상병(1930~1993)이 있고, 멀게는 두보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고의 문장가였던 ‘술의 시인’ 이태백(701~762)이 있다. 특히 이태백은 술에 취해 놀던 중 강물에 비친 달을 잡겠다고 물속에 뛰어들었다가 죽었다고 하니, 새삼 그의 술에 대한 이력을 들먹이는 것은 도드라질 것도 없다.

이태백은 술을 소재로 한 시도 많이 썼다. 그 대표작으로는 거나한 취흥(醉興)을 그린 ‘술의 시’란 작품이 꼽히는데, 다분히 동양적인 이 시를 서양의 한 작곡가가 서양식으로 새롭게 풀어내기도 했다.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일을 한 독일 태생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다.

말러는 ‘술의 시’를 독일어로 번역한 것을 가사로 삼아 관현악 반주를 붙여 여섯 개의 노래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유명한 ‘대지의 노래’(Das Lied von der Erde)라는 작품이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동양’과 ‘서양’의 정서가 음(音)과 박(拍)을 매개로 만난 것이다.

이처럼 지난날 ‘음’과 ‘박’을 매개로 한 동서양의 만남이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e-메일’과 ‘활자’를 매개로 한 만남이 있다. 이태백과 말러의 만남만큼이나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작업을 해 낸 사람은, 서양철학자 김용석 전 이탈리아 그레고리안대 교수와 동양철학자 이승환 고려대 교수다.

이 둘은 127일간 다섯 차례 총 30여시간의 토론과 그 사이 주고받은 210여통의 e-메일을 매개로, 지난 세기 서구식 근대화 속에 편견과 오해로 점철된 ‘억압된 동양’과 ‘왜곡된 서양’을 책 `서양과 동양이 127일간 e-mail을 주고받다`(2001. 휴머니스트)를 통해 대담형식을 빌어 풀어냈다.

서양철학자와 동양철학자가 각자의 철학적 사유를 일상어로 드러내 보이는 이 대담집은 평단으로부터 “문명간의 ‘상생’과 ‘대화’의 21세기라는 시대정신을 순발력 있게 담아내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들은 두 사상의 특징이 서로에게 공유되는 지점과 불일치하는 지점을 들춰내며 철학의 기원부터 현재의 한국 사회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과정은 섣부른 절충주의도 아니고, 영원한 대립의 평행선도 아니다. 단지 해법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두 교수는 책의 첫 머리에 “출판사로부터 대담 제의를 받았을 때 머뭇거렸다”고 밝히고 있다. 동양과 서양의 이분법, 서양에 대한 피해의식과 열등감, 동양인 또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존심 등 이 땅에서 동과 서를 함께 떠올릴 때 동반되는 여러 ‘짐’이 두 교수의 어깨를 짓누른 때문일 터. 하지만 이들은 고심 끝에 대담을 결심했고, 오랜만에 우리 나라 지식인들의 유쾌한 논(論)과 쟁(爭)을 보여주고 있다.(사진 = 구스타프 말러 초상. 그림 = 술취한 이태백) [북데일리 황정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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