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판타지` 아동문학의 가능성!
`한국적 판타지` 아동문학의 가능성!
  • 북데일리
  • 승인 2006.09.04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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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반지의 제왕>으로 잘 알려진 톨킨은 ‘판타지의 기능’을 3가지로 추려서 말했다. 첫째 Recovery(회복), 둘째 Escape(탈출), Consolation(위안) 이 그것이다.

고도의 문명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이미 신화적 시대의 초자연적 존재를 울타리 밖으로 밀어낸 지 오래이다. 첨단의 과학 문명과 이성 중심의 근대화가 이루어지기 이전에는 바보도 무당도 요정들도 한 동네에 우리와 함께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가 신(기독교에서 말하는 일신론 적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의 죽음을 공언했던 니체 이후 우리의 삶 속에서 미신적 존재들은 동구 밖으로 배척당하고 말았다.

샤만은 문명의 공적이고 바보는 문명의 불량품으로서 통시적 역사의 장에서는 수용될 수 없는 존재들로 낙인찍히게 된다. 전자를 제거하기 위한 마녀 사냥, 후자를 감금하기 위한 정신병원이 근대화의 부산물이란 점을 생각해보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무당, 바보, 요정, 주술사와 같은 존재는 그저 이야기 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별세계의 또 다른 존재들일 뿐이다.

인류의 미래를 향한 추동력은 이성에 기반을 둔다고 믿게 된 근대이후 사회는 역사 밖으로 밀려난 것들을 오래된 인류의 무의식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도록 역사박물관에 박제해 두었다. 그렇지만 융이 말한 바대로 인간은 태곳적부터 답습된 집단적 원형이란 칩을 무의식에 저장하고 태어난다. 그 집단 무의식 속에 살아있는 모든 영적인 존재, 불가해하고 기이한 존재들은 마땅히 억압되어야 하는 불쌍한 존재들로서 현실 생활의 영위를 위해 의도적으로 도외시되어 왔다.

그러나 인간이 거울에 자신의 육신을 비춰볼 수 있듯이, 꿈을 통해 자신의 정신과 초 정신을 비춰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프로이트 이후, 억압된 것은 어떤 식으로든 의식의 틈을 비집고 튀어 오르는 잭-인-더 박스(Jack-in-the-box)와 같은 것임을 서서히, 아주 서서히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면서 오래전부터 구전되어 전해온 무당과 요정과 마법사와 주술에 대한 이야기들이 재조명되기 시작하면서 글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것은 판타지 세계에서 현실계의 뒤쪽 혹은 옆쪽에 놓여있는 상상계의 주인공들의 이야기이며 이성중심의 각박한 사회로 부터 도망가서 알 수 없지만 따듯한 어머니의 자궁 같은 태고로 돌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회귀본능의 욕망을 충족시켜준다.

톨킨의 말한 판타지의 3대 기능이 바로 그것이다. 로고스 중심의 사회에서 파토스의 수용을 통해 잃어버린 인간 존재의 원형을 회복하는 것, 그러기 위해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닌 현실 속에서 현실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 그리고 그런 일련의 노력이 개개 삶에 커다란 위안이 되어 총합적 자아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지금까지는 모두 서양 중심의 ‘판타지 론’이다. 이제 강숙인 선생이 쓴 <뢰제의 나라>(푸른책들. 2003)로 들어가 보자. 오래전 선도(仙道)의 옥추보경(玉樞寶鏡)을 공부한 적이 있다는 선생은, 그 경전 속에 있는 심오한 동양 철학과 초월적 세계에서 예 사람들의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옥추보경 속의 상제인 `구천응원뢰성보화천존`에 우레 뢰(雷)자가 들어있는 것이 선도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는데, 즉 뇌성벽력이 천지만물을 잠에서 깨어나게 한다는 철학이 그것이다.

그래서 강숙인 선생은 우뢰를 다스리는 신 뢰사호응을 시켜 판타지 세계의 황제 뢰제의 명령을 세계에 전하도록 하는데, 이는 우리 모두를 미몽에서 깨어나게 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 이야기는 동양적 분위기, 선도가 주가 되는 무대에서 펼쳐진다. 주인공 소년 다함이는 열두 번째 생일을 맞아 동양철학에 정통한 외할아버지로부터 부적을 선물로 받게 된다.

다함이는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일 년 전 어머니를 잃은 개인적 아픔이 있는 소년이다. 부적을 선물 받은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동생 다예와 함께 뒷동산에 놀러간 다함이는 문화재도굴꾼들이 폐가에 숨어 문화재를 도둑질하는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나 인기척에 놀란 도굴꾼들로 부터 추격을 당하다 교통사고로 영혼이 육체로 부터 이탈되는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판타지의 세계가 펼쳐지는데, 저승사자 368호의 손에 이끌려 황천을 건너게 된 다함이는 영부(靈府)에 가게 되고, 다함이의 이승 목숨이 다하지도 않았건만 미리 영부로 데리고 온 저승사자 368호는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어떻게 하든 다함이를 이승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뢰사호응을 찾아 나선다.

다함이는 영부에서 불완전한 존재로서 이제 꼼짝없이 저승사자 368호의 손에 자신의 2번째 목숨까지 맡겨야 할 운명이다. 다행이 다함이를 돕고자하는 여러 빛이 되는 존재들이 곳곳에서 다함이에게 도움을 주는데, 그네들에게는 그럴만한 또 다른 사정이 있다.

본래 영부에는 최고 통치자인 뢰제 밑에 네 대제가 질서를 유지하며 죽은 생명들의 목숨을 거두고 천기를 다스렸는데, 그만 권력에 눈이 멀게 된 네 대제가 쿠데타를 일으켜 뢰제의 영혼을 묶어두게 된다. 뢰제의 결박당한 영혼을 구해낼 수 있는 자는 영부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뢰제의 숨겨진 아들뿐이라는 소문이 횡횡하다.

그러나 쿠데타가 있던 해부터 다함이가 나타날 때가지 28년 동안 많은 젊은이들이 뢰제의 아들이란 계시를 받고 뢰제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나섰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백호, 주작, 청룡, 현무로 상징되는 네 대제는 이제 신성을 잃고 사악한 짐승으로 존재하는데, 그들이 신성을 회복하지 않는 한, 천기가 제멋대로 흘러 천체의 운행이 파국을 향해 치닫게 된다고 한다. 또한 이런 상황에서는 다함이를 지상의 세계로 돌려보내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뢰옹의 도움으로 백운과 청랑이란 젊은이가 다함이의 소원과 영부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악한 네 대재가 있는 궁궐로 가게 되는데...

이야기의 얼개는 이렇게 전개된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 봐야하는 것은 `백호, 청룡, 주작, 현무`로 대표되는 네 대제의 동양의 신화적 존재들의 등장과 빛이 되는 인물로서의 구원자 청랑이다. 그들의 존재는 서양 판타지에서 등장하지 않는 철저히 동양적 모습을 갖고 있다. 또한 그들은 무력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서양 판타지의 구원자의 성격과는 다르게 무력을 너머서는 부드러움으로 악에 물든 네 대제의 본성(천성)을 회복시켜 준다.

물론 이 과정에서 고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칼의 날카로움을 능가하는 따듯한 눈물의 힘에 원수조차 감동시킬 수 있다는 `부드러움의 미학` 이것을 동양적이라고 해석하기에는 과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서양의 역사에서는 볼 수 없는 부드러움임은 분명하다.

또한 영웅이 등장하는 서구적 판타지와는 달리, 뢰제의 아들로 밝혀진 청랑은 권력을 사양하므로 써 서구적 영웅성을 능가하는 정신적 고귀함을 보여주는 인물을 보여준다. 동정심 있고 신뢰와 사랑을 믿고 숭배하는 따듯한 마음을 지닌 영웅, 어딘지 서구적 판타지에 판타지 규범(canon)을 맞춰 온 우리들에게는 얼핏 보기에 유약하고 맥없어 보이는 인물로 느껴질 수도 있다.

분명 <뢰제의 나라>는 일신교 적이고 단선적인 운명의 기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기에, 명부니 환생이니 하는 장치가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다. 물론 서구에서도 육탈된 영혼의 이야기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작가가 후기에서 밝힌 대로, 이 이야기는 `선교`의 입장에 입각해 만들어진 짜임새가 조밀한 동양의 판타지인 것이다.

고전을 재해석하는 놀라운 지력과 촘촘한 피륙을 짜내는 정교한 기술은 감탄스러운 장인 정신의 전형을 보여준다. 작가의 나이 또한 만만치 않다. 1953년생이니 이미 50대인 작가는 <아, 호동 왕자>,<청아 청아 예쁜 청아>,<화랑 바도루> 등을 펼쳐낸 바 있다. 그녀는 이미 우리 이야기를 재발굴해 현대화하는데 특별한 천착을 보여 온 진짜 장인인 것이다. 판타지가 서구적인 것으로 자꾸 생각되는 것은 나만의 오해는 아닐 것이다.

책보다 영화가 히트를 치는 역전현상을 보이면서 수입되어 들어오는 서양의 판타지들에 길들여진 우리네 문화 풍토 속에서 꿋꿋하게 우리네들 속의 얼나를 찾아 우리네 민담과 전설과 신화를 연구하고 노련한 필력으로 풀어내는 이야기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값진 소득인가! 그런 점에서 나는 강숙인 선생의 사진을 보고 또 보면서 작가의 두둑한 배짱에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게 된다.

[북데일리 시민기자 김영욱 sylplus@naver.com]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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