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평생 `옆으로 걸었던` 시인 비추는 개울
한 평생 `옆으로 걸었던` 시인 비추는 개울
  • 북데일리
  • 승인 2006.05.23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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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앉아 있자니 피로가 쌓이고 눈꺼풀이 떨어지지 않자 눈꺼풀을 뜯어 바닥에 내던졌다. 그러자 눈꺼풀이 떨어진 곳에서 키 작은 나무 한 그루가 자라났다.”

달마가 늘 깨어 있으려고 자신의 눈꺼풀을 잘라냈더니 그 자리에서 차나무가 자랐다는 전설은 다도와 참선의 불가분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열림원.2003)를 읊으며 개울가에서 반가사유상처럼 앉아있는 최승호 시인이 있다.

“개울에서 발을 씻는데/잔고기들이 몰려와/발의 떼를 먹으려고 덤벼든다/......//내가 잠시/더러운 거인 같다/물 아래 너펄거리는/희미한 그림자 본다/그 너덜너덜한 그림자 속에서도/잔고기들이 천연스럽게 헤엄친다/....../손으로 물을 끼얹어도 잔고기들은/물러났다가 다시 온다”(‘그림자’)

거울 같은 개울물 속의 피라미는 부처님 발아래서 노니는 인간들에 다름 아니다. 흩어졌다 다시 몰려드는 물고기의 모습은 마치 하늘 위 구름의 풍경을 연상한다.

“하늘이라는 無限화면에는/구름의 드라마,/늘 실시간 생방송으로 진행되네/......//누가 참 염치도 없이 내다버렸네/껍데기만 남은 텔레비전이/무슨 면목없는 삐딱한 영정처럼/바위투성이 개울 한 구석에 처박혀 있네/텅 빈 텔레비전에서는/쉬임없이/서늘한 가을물이 흘러내리네”(‘텔레비전’)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를 보는 듯 개울가의 텔레비전 틀에서 시인은 문명과 자연의 그로테스크한 교접을 목격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아직도/너덜너덜한 소굴에서 살아간다/시커먼 연기가 솟고 소방차들이 달려왔을 때/무너지는 잿더미 앞에서 울고 있는/아이와 노파를 나는 보고 있었다//......//그 누구도 物王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넝마촌과 붙어 있는 고물상, 폐품들의 무덤/그 크기는 왕릉만 하다/나는 그것을 古物王의 무덤이라고 불러본다”(‘가난한 사람들’)

영정처럼 개울물에 처박혀 있던 폐 텔레비전은 도시의 변방에서 무덤처럼 살면서 잿더미로 삶이 무너져서야 발굴되는 가난한 사람들의 시선이다.

“죽뻘에서 죽는다는 것은/썰물과 밀물, 그 반복되는 바다의 애무 밑에서/이불 없이 잠자는 것이다/죽뻘에는 비석이 없다 그러나 나는 게를 위해 묘비명을 쓴다/......//구멍으로 나와서 구멍으로 들어가는/게의 흔적은 뭉개지고 지워진다/....../혼돈의 반죽 같은 상태로”(‘죽뻘’)

뻘 구멍을 들락거리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게 같은 생을 위해 시인은 기꺼이 비명을 새겨준다. ‘한 평생 옆으로 걸었노라!’

“죽음 너머/내가 태어나기 전의 고향//아무것도 없이/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서/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일 없었던/나//그 無一物의 고향으로 가는 문짝이/지금 내 안에서 퀴퀴하게/썩고 있다”(‘아무 일 없었던 나’)

죽음 저편 혼돈의 고향으로 가는 문짝의 안팎이 잘 삭고 있다. 그렇게 잘 썩어지면 달마처럼 깨어있는 투명한 거울의 눈을 얻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면서/모든 것이/나인/空王처럼//고요한 투명성의 來歷은 오래된 것이다/눈꺼풀을 떼어낸 눈처럼/거울은 눈을 감지 못하고 있다”(‘거울과 눈’)

시인의 발아래로 다시 맑은 개울물이 흘러가고 구름이 몰려왔다 흩어진다. 개울가에 오랫동안 앉아있던 시인이 안경을 벗어 물 속에 던지자 그 자리에서 큰 거울이 하나 떠올랐다.

모든 흘러가는 것들과 절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들을 비추는 `마음의 거울`이 허공에서 세상을 굽어보고 있다.

[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fargo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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