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보리밭처럼 푸르른 오월의 시인
청보리밭처럼 푸르른 오월의 시인
  • 북데일리
  • 승인 2006.05.16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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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창가에 앉아 풀씨가 눈처럼 흩날리는 거리를 내다봅니다. 오월의 거리는 아무 일 없는 듯 평화롭기만 한데 창문을 두드리는 풀씨의 아우성에 공연히 찻잔만 흔들립니다.

풀꽃은 꺾이지 않는다, 풀꽃은 꺾이지 않는다, <풀꽃은 꺾이지 않는다>(창비.1995)고 오월의 묘지에서 풀씨를 폴폴 불어대고 있는 조태일 시인.

“풀씨가 날아다니다 멈추는 곳/그곳이 나의 고향,/그곳에 묻히리.//......//풀씨가 날아다니다/멈출 곳 없어 언제까지나 떠다니는 길목,/그곳이면 어떠리./그곳이 나의 고향,/그곳에 묻히리”(‘풀 씨’)

시인의 고향은 전남 곡성 태안사. 주지였던 아버지는 여순반란사건으로 절에서 쫓겨난 후 죽음을 맞이하면서 여섯 살의 시인에게 “30년이 지난 다음에 고향땅을 찾으라”는 유언을 남긴다.

“나라가 위태로웠던 칠십년대 말쯤/아내와 어리디어린 세 아이들을 데리고/고향 떠난 지 삼십년 만에/내가 태어났던 태안사를 찾았다.//여름 빗속에서 칭얼대는/아이들을 걸리며 혹은 업으며/태안사를 찾았을 때/눈물이 피잉 돌았다.”(‘태안사 가는 길1’)

그 후 시인은 고향을 떠나 청보리밭처럼 흔들리며 춤을 추며 한 세대를 건넜다. 모든 흔들림이 자신만의 것인 냥,

“풀꽃들이 흔들리고 있을 때/바람들이 몰려와 옆에 섰다./바람들이 멈추었을 때/풀꽃들은 더욱더욱 흔들렸다.//......//황홀하다 춤을 추자/신바람나는 일은 너희들 것이고/싸워야 하는 일은 나의 일이다.//오늘도 높푸른 하늘을 머리에 이고/풀꽃처럼 춤을 춘다/바람들을 옆에 두고/목이 타서 홀로 홀로 춤을 춘다.”(‘풀꽃들과 바람들’)

시인은 허공에 깃발 대신 한 송이 꽃을 피워 올리는 뿌리를 내리고자 했다. 더 많이 흔들려야 풀씨 몇 알 공중에 심을 수 있으리라.

“뿌리들은 마침내/향그러운 몸뚱어리 드러내/공중으로 뻗었다.//저 푸른 하늘을 향해/뿌리들은 꽃숨을 뿜어서/오월을 환히 열었다.//뒤틀리는 가슴 쥐어뜯으며/밤낮없이 오늘도 엎드려/뒤척이면서 깃발 대신 뿌리 세웠다.//벌 나비 한껏 취해/보라, 오월 하늘을 어지러이 날아다닌다.”(‘공중에 핀 꽃’)

하여 공중에 핀 그 꽃은 결코 꺾이지 않는다. 땅에 뿌리를 내린 사랑의 노래가 물관을 타고 올라와 척박한 세상을 따뜻하게 위무해주는 풀꽃.

“사람들은 풀꽃을 꺾는다 하지만/너무 여리어 결코 꺾이지 않는다.//피어날 때 아픈 흔들림으로/피어 있을 때 다소곳한 몸짓으로/다만 웃고만 있을 뿐/꺾으려는 손들을 마구 어루만진다.//땅속 깊이 여린 사랑을 내리며/사람들의 메마른 가슴에/노래 되어 흔들릴 뿐.//꺾이는 것은/탐욕스런 손들일 뿐.”(‘풀꽃은 꺾이지 않는다’)

그래서 오월은 시인에게 꽃씨를 풀어 세상을 껴안는 달, 뿌리가 마를 때까지 사랑의 노래를 불러 대지를 촉촉이 적셔주는 달.

오월의 이층 찻집에서 공연히 찻잔 흔들리는 건 재채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풀꽃 때문만은 더욱 아닙니다. 그냥 하염없이 그리워지는 것이 오월의 풀꽃 속에 있나 봅니다.

[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fargo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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