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세상 밝혀주는 시인의 희망 노래
진흙세상 밝혀주는 시인의 희망 노래
  • 북데일리
  • 승인 2006.05.11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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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란 대저, 한평생 제 영혼을 헹구는 사람 ”(임영조 시인)

“병이 나으면 시인도 사라지리라”(진이정 시인)

시인의 존재는 일생을 고통 속에서 영혼을 다듬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럼 시인이 사라진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문학평론가 최동호 교수는 최근 평론집 <진흙 천국의 시적 주술>(문학동네.2006)에서 디지털시대의 황폐에서 인간을 구하는 것이 ‘시’라고 얘기한다.

최 교수는 “시인이 사라진다면 인간의 인간에 대한 각성도 사라지고, 인간이 인간이기를 거부하게 될 것이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 과연 시와 시인은 살아있는 것일까.

“최근 국문과 대학원생들의 전공은 압도적으로 소설이 차지하고 있다. 대학원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하려는 학생들의 흥미가 소설 쪽으로 기운 것은 영화나 애니메이션 게임에서 요구하는 서사적 구성이 그들의 관심을 끌기 때문이다.”

시가 더 이상 정치적 ‘무기’가 되지 않는 시대에 시의 자리를 판타지가 있는 소설이 차지하고 있다는 얘기다.

인간이란 존재 그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시인은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최 교수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인간은 노예가 아니다(식민지 해방운동 시대),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민주화 노동운동 시대), 인간은 양이고, 원숭이다(디지털적 생명공학 시대)”

노예와 기계의 시대에 시는 인간을 구원하는 존재였지만, 복제의 시대에 시는 디지털의 속도에서 오는 쾌감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시의 위기를 말하곤 한다.

“단군이 개국하여 신시를 연 이후 한민족의 가장 행복했던 체험이었던 월드컵은 시가 할 수 없었던 그러나 시가 도달해야할 극치의 한순간을 우리는 경험했다.”

월드컵의 감동 자체가 ‘시’인 시대에서 그럼 시인의 존재는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일까.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야성적 추동력인지도 모르지만, 자기 확인이 없는 일방적 전진은 그 속도감만큼이나 위험성을 내포한다”는 최 교수는 “시를 읽는 시간은 인간의 삶에 풍요로움을 되살려줄 것이다”고 감히 주장한다.

삶이 힘들수록 오히려 시인의 존재는 척추처럼 든든하게 세상을 받쳐줌을 최 교수는 이성복 시인의 시를 통해서 들여다본다.

“매점 앞에서 보초 설 때는, 단팥빵/맛이 조금만 이상해도 바닥에 던지고/가는 녀석들이 있었다 달려드는 중대장의/세퍼드를 개머리판으로 위협하고, 나는/흙 묻은 빵을 오래 씹었다 비참하고 싶었다/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이성복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중에서)

세계를 개혁하기에는 너무나 무력한 언어를 가졌지만, 스스로 비참해짐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사람이 시인임을 역설하고 있다.

진흙으로 뒤덮인 세상이 천국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사랑하는 자만이 등뼈 있는 슬픔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의 미래가 없다면 인류의 미래가 없는 것이고, 시인은 진흙 세상에서 희망의 올실을 짜는 사람이리라.

(사진=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National Gallery, London)

[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fargo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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