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 참 뾰족하오" 음락서생의 한시체험기
"거 참 뾰족하오" 음락서생의 한시체험기
  • 북데일리
  • 승인 2006.03.31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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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당쟁에 밀려 벼슬길을 포기하고 천하를 유람하는 김련(金戀)은 글재주가 좋아 ‘춘월색(春月色)’이라는 필명으로 뭇 아녀자의 마음을 후리고 다녔다. 한양을 벗어나 천안에 이르렀을 즈음 강가 버들 빛이 나긋나긋한데 어여쁜 처자가 버드나무 아래서 그네를 타고 있다. 앙큼한 음락(淫樂)서생의 가슴이 춘정으로 불타오른다.

“버들이 푸르러 베를 짜는 듯하니, 긴 가지 그림 속 누각에 떨쳤도다/원컨대 그대는 부지런히 심어라, 이 나무 가장 풍류로우니라/버들이 자못 푸르고 푸르나니, 긴 가지 빛난 기둥에 떨쳤도다/원컨대 그대는 부질없이 꺾지 마라, 이 나무 가장 정이 많으니라.”(구운몽‘楊柳詞’)(楊柳靑如織 長條拂畵樓 願君勤栽植 此樹最風流 楊柳何靑靑 長條拂綺楹 願君莫漫折 此樹最多情)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에서 양생이 진채봉을 꼬시기 위해 읊은 ‘양류사’가 절로 나온다. 양기가 절로 솟는 봄에 흐드러진 버들가지가 몸에 착착 감겨오니 혈기왕성한 춘월색은 발정 난 숫말처럼 공연히 버드나무에 투정을 부린다. 그러나 여인은 집안으로 들어가더니 좀체 나오지 않는다.

“용왕 딸이 피리에 홀려 박선생에게 시집가/백년고락 같이 했다는 말이 맞는군./임공 과부(탁문군)보다야 낫고말고/거문고 소리에 몸을 버렸다니 원.”(이규보 ‘題朴淵’)(龍娘感笛嫁先生 百載同歡便適情 猶勝臨邛新寡婦 失身都爲聽琴聲)

이거야 원. 춘월색의 작업에 넘어가지 않은 조선의 아녀자가 없거늘. 탁문군을 꼬신 사마상여처럼 칠현금이라도 타야 한단 말인가. ‘낭패로세’ 하면서 다시 길을 재촉하는데 귀밑 솜털이 아직 보송보송한 소년이 호기롭게 말을 타고 지나간다. 어젯밤 기방에서 진탕 술을 마시고 말채찍을 잃어버린 게 틀림없다.

“산호 채찍 잃어버린 뒤/흰 말이 뻗대며 나가려 하지 않네./장대의 버드나무 가지를 꺾나니/봄 거리의 애틋한 풍경.”(최국보 ‘長樂少年行’)(遺却珊瑚鞭 白馬驕不行 章臺折楊柳 春日路傍情)

할 수 없이 장터 객주에 여장을 풀고 잠을 청하려는데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다. 천하의 춘월색의 꼴이 이게 뭐람. 소년처럼 기방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도 없고...... 돈도 돈이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억지로 잠을 청하려 옛정을 되새겨 보는데,

“달 밝은 창해에 눈물은 옥구슬 되어 떨어지고/햇볕 따스한 남전 옥돌에는 아지랑이 피어나네./이 감정도, 추억으로 되는 때가 있어/그때는 나도 꿈속처럼 어렴풋하리라.”(이상은 ‘琴瑟’)(滄海月明珠有淚 藍田日暖玉生煙 此情可待成追憶 只是當時已惘然)

그래도 남옥이와의 한때가 좋았구나. 그때 좀 더 잘해주지 못하고 사내의 객기만 부렸는지 못내 후회스럽다. 그러나 여인은 물과 같은 것, 보내면 다시 또 오게 되어있지 않은가. 어디선가 피리 소리가 들려와 애간장을 더 태운다. 봄밤이 이리 괴로울 줄이야.

“봄날 밤은 한 시각이 곧 천금/꽃은 맑은 향기 품고 달빛은 어스름하다./누대에선 노래와 피리 소리 가늘게 들려오고/그네만 남은 정원에 밤은 점점 깊어간다.”(소식 ‘春夜’)

(春宵一刻直千金 花有淸香月有陰 歌管樓臺聲寂寂 鞦韆院落夜沈沈)

지저귀는 새소리에 눈을 뜬 춘월색. 발을 걷으니 한 눈에 먼 산이 그대로 들어온다. 밤사이 비가 내렸는지 촉촉이 젖은 땅 위에 산 빛이 더욱 짙푸르다. 산을 바라보며 서경덕의 ‘비 온 뒤 산을 보다’를 읊자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누대에서 일어나 문득 발을 걷으매/비 그친 뒤 산 빛이 너무도 싱싱하다./아무리 훌륭한 화가라도 그려내기 어려우리/구름 걷히자 드러나는 푸르고 뾰족한 봉우리.”(서경덕 ‘雨後看山’)(睡起虛樓忽上簾 雨餘山色十分添 看來難下丹靑手 雲卷高岑露碧尖)

한참을 생각에 잠기던 춘월색이 느닷없이 행장을 꾸리고 산으로 들어간다. 뒤에서 주모가 애타게 부른다. “젊은이 거기는 아무나 못 들어가는 곳인데...”하자, 춘월색이 뒤돌아서며 빙그레 웃더니 “문학동네가 있는 <한시의 세계>(2006)로 갈라우”. 춘월색이 쓰던 갓을 벗어 높이 던지자 산꼭대기에 뾰족한 봉우리 하나 생겼다. ^

(그림 =윤두서의 `류하백마도(柳下白馬圖)`)[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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