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은 왜 이궁에 머물렀을까.
조선 왕은 왜 이궁에 머물렀을까.
  • 박세리 기자
  • 승인 2012.10.29 18: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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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을 통해 본 조선 <궁궐, 조선을 말하다>

[북데일리] 조선의 궁궐은 왜 하나가 아니었을까. 물론 외세의 영향이 있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궁궐은 법궁과 이궁이라는 위계가 있다. 조선의 왕들은 이궁(보조 궁궐)에 머물기를 즐겨했다. 이와 관련한 내용이 <궁궐, 조선을 말하다>(아트북스.2012)에 있어 소개한다.

<책 속의 지식>궁궐에는 법궁과 이궁이라는 위계가 존재한다. 법궁은 그야말로 왕실의 으뜸 궁궐로 임금은 법궁에 임어해 정사를 돌보고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원칙이고, 이궁은 법궁을 보조하는 궁궐이다. 한데 경복궁이 조선 왕실 만고의 법궁이라 인식되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조선 전기의 법궁은 경복궁, 조선 후기의 법궁은 창덕궁이라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임금들이 법궁에서만 살았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 주목된다. 임진왜란 이전에 법궁 경복궁을 두고 창덕궁에 주로 임어했던 임금은 태종과 성종이 대표적이다. 조선후기도 마찬가지다. 창덕궁 대신 경희궁이나 창경궁을 선호했던 임금들이 있다. 영조의 경희궁이 그렇고 정조의 창경궁이 그렇다.

여기에는 그들의 개인적인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지만 빈(嬪)의 소생이다. 종묘에 향사될 수 있는 인물은 임금과 그의 정식 왕비뿐이다. 영조의 생모 숙빈 역시 종묘에 향사될 수 없었기에 연산조의 예와 같이 별도로 묘우를 구성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육상궁이다.

그런데 경복궁의 서쪽 시가지에 위치한 육상궁의 향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창덕궁에 임어하는 것이 불편했다. 영조가 경복궁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 점이나, 경희궁에 비교적 오랜 기간 동안 임어한데에는 이러한 지리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는 정조도 마찬가지였다. -214쪽~217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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