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입은 세상 `그녀가 내 멍을 핥을 때`
상처 입은 세상 `그녀가 내 멍을 핥을 때`
  • 북데일리
  • 승인 2005.12.12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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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자루 같은 갈대들이 앙상한 초겨울 강변. 나는 형조판서의 첩인 기생 매향을 희롱한 죄로 ?기고 있다. 길판서가 보낸 별순검, 김충규가 나의 연적이니 일이 커진 셈이다. 하필 매향이 <그녀가 내 멍을 핥을 때>(문학동네. 2003), 그가 기방을 짓쳐들어 왔다. 나는 밤길을 도와 종로에서 뚝섬까지 쉬지 않고 내달렸다. 강가에 이르러 잠시 숨을 고른다.

“무시로 무너지는 멍든 하늘을/견뎌내느라 물은 퍼렇다 멍이/가실 날 없다 물은 멍을 번식시킨다/물고기의 몸에 있는 자잘한 반점도/자세히 들여다보면 멍자국이다/물을 내려다볼 때마다/아무 생각 없이 멍해지는 자,/그의 몸에도 멍이 자라고 있다/멍이 멍을 알아볼 때 누구든 멍해진다/제 생애를 멍에처럼 짊어진 자들이/자주 물가에 홀로 나와 멍해진다/멍든 자는 결코 동행하는 법이 없다”(‘멍’)

온몸이 멍투성이다. 진주 출신의 김순검은 무예실력 못지않게 시화에도 능했다. 그는 일합을 겨루기 전, 매향을 포기하라면서 시 한수 건네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풍경을 업고 가던 나비가 힘에 겨워 뒤뚱거리자/풍경이 와르르 엎질러진다 그 순간/나비는 풍경 밖으로 제외되고 풍경은 텅 비어버린다/텅 빈 풍경의 살점을 소나기가 흉기처럼 긋고 간다/풍경의 살점에 고랑이 패고 빗물이 스며든다/씨앗 몇 알을 물고 지나가던 바람이/그 고랑 사이에 씨앗을 심는다/....../씨앗은 부풀어오르는 초록을 꺼내놓는다/싸늘했던 풍경이 일순간 푸르게 변한다/....../감히 나비는 풍경을 업고 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나비와 풍경’)

나비는 나요, 소나기는 김순검이라! 어설픈 나비의 날개로는 빗방울 한 점 튕기지 못하는 거였다. 시가 끝나자마자, 김순검의 언월도가 달빛 속에서 푸르게 흐느꼈다.

“감추지도 않고, 달이 하혈하는 밤에는/세상이 적막하다/달의 핏자국이 잎마다 맺힌 나무들은/후끈 신열을 앓는다/그 나무들 사이로 걸음을 옮길 때면/땅도 젖어 질척거린다/....../하혈하며 달은 앓는 소리를 낸다/그 소리 들을 때마다/내 아랫도리에도 피가 몰려 욱신거린다/내 불알 속엔 평생 하혈 못 하는/두 개의 달이 웅크려 있다” (‘하혈 못 하는 두 개의 달’)

김순검의 칼날은 정확히 내 낭심을 향하였다. 피할 틈도 없이 나는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매향을 취하려던 나를 향한 연적의 증오심이 얼마나 깊었는지 짐작이 갔다. 허나 어쩌랴.

“무엇을 완성하려고 하면 안 된다,/대숲에선 속에 든 것을 울컥울컥/토해놓아야 한다 토해놓을 것이 없으면/내장이라도 토해놓아야 한다/나날이 비우고 비우기 위하여/사는 대나무들,/비운 만큼 하늘과 가까워진다/하늘을 보라, 가득 채워져 있었다면/어찌 저토록 당당하게 푸르를 수 있겠는가/다 비운 자들만이 죽어 하늘로 간다/뭐든 채우려고 버둥거리는 자들은/당장, 대나무 앞에 무릎을 꿇어라” (‘대나무 앞에 무릎을 꿇어라’)

나는 뚝섬 대밭으로 끌려갔다. 김순검은 거기서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은 채, 내 옷을 벗겼다. 그러더니 무릎을 꿇게한 후, 대나무에 올라 타라고 했다. 떨어지면 재미없다며...

“냇가로 끌려가면서 돼지는 똥을 쌌다/제 주검을 눈치챈 돼지는/아직 익지 않은 똥을 수레 위에 무더기로 쌌다/콧김을 푹푹 내쉬며 꿀꿀거렸다/입가에는 거품이 부글부글 끓었다/....../돼지가 냇가에 도착했을 때/거기 먼저 도착해 있는 것은/숫돌을 갈고 있는 칼이었다/칼이 시퍼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체념한 듯 돼지는 사람들을 둘러본 뒤에/씩 웃었다 그 순간, 쑥 들어오는 칼을/돼지의 멱은 더운 피로 어루만졌다” (‘냇가로 끌려간 돼지’)

젠장, 세상에 언놈이 대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궐련 한 대가 다 타기도 전에 나는 겨울매미처럼 대나무에서 툭 떨어졌다. 죽음을 예감한 나는 금속의 칼보다 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그 칼을 따뜻하게 애무해주었다. 그거였다.

마지막 숨이 끊어지기 전에 김순검은 내게 유언이 있느냐 물었다. 나는 梅香이 아직 먼 겨울이지만 따뜻한 빛을 찾아 나선 이들을 위해 무덤가에 환한 등불을 걸어두고 싶다고 했다.

“죽은 별을 위해 지상의 그 누가 울고 있는지/밤이 깊어질수록 어둠이 물결처럼 일렁거린다/하늘 너머가 혹 저승이라면/오늘밤은 저승 전체가 정전으로 혼란스럽겠다/빛을 찾아나선 저승 사람들이/캄캄한 틈을 타 이승으로 몰려오겠다/그들 중 한사람이라도 길을 헤매지 말라고/집 밖에 등불을 내걸고 싶다”(‘캄캄한 밤’)

누군가 내 멍든 상처를 부드럽게 핥아줄 때, 내 멍은 달걀노른자 같은 달 속으로 빨려들어 가겠다. 나 또한 멍 같은 달이 되어 상처 입은 세상 모든 것들을 달걀처럼 어루만져주고 싶다. 그 푸른 멍이 하늘로 다 옮아가도록......

(사진 = 전통한복인형 `연지` 제공, 출처 www.dollskorea.com) [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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