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겨울 자꾸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한다`
이 겨울 자꾸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한다`
  • 북데일리
  • 승인 2005.12.09 09: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 겨울 자꾸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한다`

“카테리니행 열차는 8시에 떠나가네. 11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 내 기억 속에 남으리. 카테리니행 기차는 영원히 내게 남으리...... 기차는 멀리 떠나고 당신 역에 홀로 남았네. 가슴 속에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기차는 8시에 떠나네’가 애잔하게 흐르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시인은 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지그시 눈을 감는다. 붙잡아도 자꾸만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이병률. 문학동네. 2005).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찾아 길 떠나기 전날 밤, 허기진 고양이의 눈처럼 절박한 불빛을 만난다. 그 형형한 눈빛을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늦은 밤 쓰레기를 뒤지던 사람과 마주친 적 있다/그의 손은 비닐을 뒤적이다 멈추었지만/그의 몸 뒤편에 밝은 불빛이 비쳐들었으므로/아뿔싸 그의 허기에 들킨 건 나였다/....../사랑을 하러 가는 눈과 마주쳤을 때도 그랬다/....../이럴 땐 눈이 눈에게 말을 걸면 안 되는 심사인데도/자꾸 아는 척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처럼/내 눈은 오래도록 그 눈들을 따라가고 있다/또 한번 세상에 신세를 지고야 말았다 싶게/깊은 밤 쓰레기 자루를 뒤지던 눈과/사랑을 하러 가는 눈과 마주친 적 있다”(‘누’)

방으로 돌아온 그는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를 보다가 하염없이 운다. 영화의 부제인 ‘베이징서머(beijing summer`)의 따스했던 햇살이 자취방 안으로 스며들었기 때문인가.

“줄자와 연필이 놓여 있는 거리/그 거리에 바람이 오면 경계가 서고/묵직한 잡지 귀퉁이와 주전자 뚜껑 사이/그 사이에 먼지가 앉으면 소식이 되는데/뭐 하러 집기를 다 들어내고 마음을 닫는가//......//빈집과 새로 이사한 집 가운데 난 길/그 길목에 눈을 뿌리면 발자국이 사라지고/전봇대와 옥탑방 나란한 키를 따라/비행기가 날면 새들이 내려와 둥지를 돌보건만/무엇 하러 일 나갔다 일찌감치 되돌아와/어둔 방 불도 켜지 않고/퉁퉁 눈이 붓도록 울어쌌는가”(‘화양연화’)

실컷 울었더니 배가 고프다. 아침이면 그는 베이징을 거처 란쩌우에서 그녀를 만나기로 되어있다. 그녀를 만나 티벳고원을 넘어 실크로드를 건너 푸른 지중해로 가기로 했다.

“밤 열두시는/밥 한 공기를 시켜/당신과 내가 나눠 먹는 일이다/그러다 밥 속에서 눈썹이 나오면 눈썹을 떠내어/몰래 식탁 밑으로 숨기는 일이다/당신의 숟가락이 지나간 자리엔/붉게 수술 자국 생겨나고/사과나무 하나 뽑혀간 것 같은 구덩이는/두 사람이 걸어온 밤길처럼 물컹하다//반찬 묻은 쪽을 먹어야 할지/안 묻은 쪽을 먹어야 할지/밤 열두시는 삶에 있어 절반이다”(‘밤 열두시’)

정체 모를 눈물의 배후는 허기였나 보다. 눅눅한 공기밥을 그녀와 함께 먹을 생각을 하니 힘이 절로 난다. 내친 김에 그는 그녀에게 편지를 쓰기로 한다.

“해가 지면 문을 열어놓고/장사를 하겠습니다/빵이라도 쪄서 팔고/그 돈으로 술이라도 사놓고/기다리는 사람 되어 길목을 쓸겠습니다/슬픔을 보이면 끝입니다//소슬한 바람이 종이 끝에 내려앉습니다/나도 귀퉁이 한 끝에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습니다/우박처럼 몰아치는 시간과/바람만이 성큼성큼 종이 위를 쓸고 지나면서/아, 하얗게 한낮을 건드립니다/오고 있는 것은 없고/지나가는 것도 없습니다/헌데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합니다/나는 죄짓지 아니하는데/허공이 엉덩이를 들석이며 죄를 짓습니다/미처 오지 못한 것은 없고/가고 오지 않는 것도 없습니다”(‘소식’)

하지만 오랜 기다림도 오늘밤이면 끝이 나겠지요. 뜬 눈으로 밤을 새우다 정든 것들과 이별을 하려는데 또 눈물이 납니다.

“이삿짐을 싸다 말고/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피우다 보니/그냥 두고 갈 뻔한 고추 몇 대/미안한 마음에 손을 내미니/빨갛게 매달린 고추가/괜찮다는 듯 떨어진다/데려가달라고 하지 않으면/모른 체 데려가주지 않는 生/새벽 하늘을 올려다보니/눈을 찌르는 매운 물기”(‘이사’)

마침내 운명의 날은 밝아오고 그는 대륙횡단 장도열차에 몸을 싣습니다. 기차가 란쩌우역에 도착했을 때, 극장 안은 그리움의 먼지들이 영사기 불빛을 타고 안타깝게 떠다닙니다.

“이번 어느 가을날,/저는 열차를 타고/당신이 사는 델 지나친다고/편지를 띄웠습니다//5시 59분에 도착했다가/6시 14분에 발차합니다//하지만 플랫폼에 나오지 않았더군요/당신을 찾느라 차장 밖으로 목을 뺀 십오분 사이/겨울이 왔고/가을은 저물 대로 저물어/지상의 바닥까지 어둑어둑했습니다”(‘장도열차’)

겨울이 왔는데도 가을은 아쉬워 홀로 저물다가 장막 뒤편으로 잦아듭니다. 기차는 떠나고 그는 광활한 대륙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독백을 합니다. 눈발이 창밖에서 같이 데려가 달라고 문을 두드립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땅은 비좁다 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적다...... 사람의 집에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일이 목메게 아름답다 적과 내가 한데 엉기어 층계가 되고 창문을 마주 낼 수 없듯이 좋은 사람을 만나 한 시절을 바라보는 일이란 따뜻한 숲에 갇혀 황홀하게 눈발을 지켜보는 일...... 먼 훗날, 기억한다 우리가 머문 곳은 사물이 박혀있는 자리가 아니라 한때 그들과 마주 잡았던 손자국 같은 것이라고”(‘좋은 사람들’)

수많은 낮과 밤을 지나 기차는 지중해 어느 해변에 닿습니다. 커다란 고욤나무 아래에서 그는 수평선 밑으로 지는 해를 바라봅니다.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when they grab one`s hand` 슬프고도 아름다운 기타 선율이 저녁바다에 파도칩니다.

[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