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가 사랑에 빠진 '그것'
움베르토 에코가 사랑에 빠진 '그것'
  • 김현태기자
  • 승인 2010.11.18 12: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화와 예술 속의 목록들...짜릿한 지적 즐거움


[북데일리] 책장에 세워져 있는 <푸코의 추>를 힐끗 보면서 에코가 소설가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책 <궁극의 리스트>를 읽으며 잠시, 그가 소설가란 사실을 잊었다. <궁극의 리스트>는 그의 이름이 기획자란 수식어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보여준다. 기획이란 일을 궁리하여 계획한다는 뜻이다. 이 책을 통해 그의 명성을 빛나게 한 원천은 글쓰기 솜씨라기보다 기획이 아니었을까 싶다.

에코는 2년 동안 루브르 박물관의 객원 큐레이터로 일했다. 그는 어느 날 루브르 박물관으로부터 하나의 주제를 선택하고, 그에 관한 일련의 회의, 전시회, 공공 낭독회, 콘서트, 영화 상영 등을 조직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서문에 따르면 에코는 주저하지 않고 ‘목록’(카탈로그와 일람표를 함께)이라는 주제를 제안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목록의 흔적을 추적한 작업은 마치 유니콘을 좇는 것 마냥 흥분되었다.”

<궁극의 리스트>는 그 결실이다. 목록. 이 단어가 모호하고 추상적으로 들린다면, 자장면 집 전단지나 전화번호부를 떠올리면 된다. 수 백 년의 시간이 흐른 뒤 인쇄매체가 사라진다면 두툼한 전화번호부 역시 21세기의 한 유물이 될 것이다. (물론 이미 유물이 되었다.) 외계인 혹은 후대 사람들은 전화번호부 속의 이름을 보며 독특한 해석을 내릴지 모른다. 요리 전단지 역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목록이다.

책을 펴면 먼저 선명하고 희귀한 수 십 장의 이미지가 눈을 휘둥그레 하게 만든다. 200장 안팎으로 보이는 삽화는 황홀한 인류의 지적유산이다. 81쪽에 등장하는 '장소의 목록'을 보자.

에코는 제임스 조이스가 '피네건의 경야'에서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 많은 장소의 목록을 제시했다고 전한다. 특히 강 이름이 그렇다. 센 강, 카테가트, 텔, 헤프, 레프케... 에코는 "이런 목록은 지칠 줄 모르는 욕심에서, 목록에 대한 순수한 사랑에서 만들어졌다"며 "어쩌면 조이스는 그저, 그 목록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호메로스의 목록 역시 흥미롭다. 그는 트로이를 침공한 그리스 군대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묘사하기 위해 350행에 달하는 함선의 지휘자와 함선 이름을 목록화 했다.

책엔 천사의 이름부터 꽃 이름, 물고기 이름까지 줄줄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 목록은 에코의 엄청난 지식편력의 목록이기도 하다. 그는 고전 속에서 건져올린 목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세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마녀들이 사용하는 불길한 재료들의 목록처럼, 때로 그것들은 우리 마음을 불안하게 한다. 마리노가 <아도니스>에서 묘사하는 수많은 꽃처럼, 때로 그것들은 황홀한 향기를 풍긴다. (중략)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에 묘사된 악기의 컬렉션처럼, 때로 그것들은 박제된 듯, 장례식처럼 거의 움직임이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날카롭고 매섭다.' 67쪽

목록엔 유골도 그 이름을 올리고 있다. 중세 시대 보물 가운데 가장 숭배 받는 경이로운 보물은 특이하게도 유골이다. 책에 따르면 중세 시대에는 한 도시나 한 교회에 유골이 있다는 것은 일종의 혜택이었다. 유골은 그저 신성한 물건이 아니라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소중한 자원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수많은 목록을 만든 이의 직업은 이름 없는 화공으로부터 최고의 예술가까지 다양하다. 반면 목록을 만든 목적은 큰 갈레를 타보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거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방편이다.

에코는 책 목록에 대한 취향이 세르반테스부터 위스망스, 칼비노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가들을 매혹시켜 왔다고 전한다. ‘쥘 베른의 독자들이 고요한 심해 탐험이나 무시무시한 바다괴물과의 조우에서 즐거움을 얻듯이, 그들은 책 목록에서 즐거움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목록에 가장 미친 작가는 바로 에코 그 자신이다.

독자들은 책을 읽은 후 '목록'에 대해 눈여겨 볼 터이다. 예컨대 서가에 꽂힌 당신 책의 목록을 보라. 사람은 그가 읽은 책이란 말처럼 그 목록은 당신 그 자체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