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미움...'관계'란 삶의 굴레
사랑과 미움...'관계'란 삶의 굴레
  • 서유경 시민기자
  • 승인 2010.11.14 18: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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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의 견고하고 아름다운 문장에 푹

 


[북데일리]<분홍 리본의 시절>(창비, 2007)로 처음 만난 권여선은 정곡을 찌르는 섬세함과 날카로움으로 기억한다. 최근 나온 <내 정원의 붉은 열매>(문학동네, 2010)도 아름답고 견고했다. 상대를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진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이런 문장 말이다.

‘누군가 그대 앞에 찻잔이든 술잔이든 빈 잔을 내려놓는다면 경계하라. 그것이 처음에는 온화하고 예의바른 권유로 보일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그것이 그대에게 가장 잔인하고 난폭한 지배로 돌변할 수도 있으니. 애당초 빈 잔에는 이런 무시무시한 의도가 담겨 있을 수도 있다. p.14

‘32회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사랑을 믿다>는 제목처럼 주인공이 들려주는 연애 이야기다. 실연을 한 그에게 그녀가 들려주던 이야기를 회상한다. 사랑이 끝난 후에 사랑을 믿었던 순간을 말하기에 현재는 사랑을 믿을 수 없다. 처음부터 연인인 관계는 없다. 친구이거나, 동료이거나. 그와 그녀도 그랬다.  일방적인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그녀가 사랑이라 했어도 그는 친구일 뿐. 시간이 흐른 뒤에야 정리된 감정을 통해 과거의 관계를 제대로 돌아볼 수 있다.

이러한 관계는 표제작인 <내 정원의 붉은 열매>에서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이 친구와 함께 대학 선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지나간 날들, 내가 기억하는 모습과 타인이 기억하는 모습은 다르다. 그리하여, 오해가 생기고 서로 어긋나기도 한다. 이처럼 한 번 잘못된 관계를 바로잡기란 너무 어려운 것이다.

‘찻잔이나 술잔, 밥공기 같은 것이 결코 화분이 될 수 없던 시절에도, 한쪽 모서리가 기운 사다리꼴의 그 방은 내게 충분히 훌륭한 화분이었다. 한때 나는 시루 속 콩나물처럼 동료들과 함께 그 방에서 쑥쑥 자라났다. 나와 동료들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함을 느낄 때마가 나는 미칠 듯이 괴로웠다. 그 당시의 나는 젊기 때문에 차이를 못 견딘다는 걸 알지 못했다. 젊기 때문에 차이를 과장하고 젊기 때문에 차이에 민감하다는 것을 몰랐다. 조사 하나, 어휘 하나에도  이고 살아야 할 하늘을 가르던 시절이었다.’ p.117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 있다. 젊다고 자부하던 그 때, 내 어설픈 행동만을 기억하는 누군가가 있을 터. 권여선의 문장이 위로로 다가오는 건 나뿐일까. 누구에게나 기억하지 못하는 작은 실수로, 누군가의 진심을 알지 못한 무심함으로 무너진 관계가 있을 것이다.

권여선은 선택할 수 있는 관계와 선택할 수 없는 관계에 대해 말한다. 후자의 경우 존재와 동시에 맺어진 관계다. 혈연으로 어어진 부모와 자식과 가족의 관계가 될 것이다. 홀 어머니와의 아픈 기억을 담고 사는 남자의 삶을 다룬 <당신은 손에 잡힐 듯>, 한 가족의 탄생 이야기인 <K가의 사람들>, 잘못된 관계로 시작된 가족이 대물림되는 <그대 안의 불우>은 모두 가족을 다루었다. 소설 어디에도 단란한 가족 관계는 없다. 부모는 서로를 증오하거나 무시한다.

<그대 안의 불우>에서 프로게이머였던 그와 그녀는 부모와는 다른 삶을 살기를 원한다. 그녀는 부모에게 결핍된 애정을 보상받고자 했기에 모든 유닛을 소중하게 여기는 그를 선택한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무시하고 아이를 유산하며 생성된 관계를 소멸시킨다. 버릇이나 습관처럼 관계마저 닮게 된다.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제 3자의 입장에서 관망하듯 그려낸 <k가의 사람들>, 예술인 마을에 여류시인이라 불리던 여자에 대한 갈망과 질투를 다룬 <웬 아이가 보았네>까지 7편은 모두 빛났고, 틈이 보이지 않았다.

몇 편의 소설은 연애소설 같았고 몇 편은 가족소설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 소설집은 애정과 애증의 관계에 대한 소설이다. 불편하게 지속되는 관계에 대해, 무한의 애정을 주지 못하는 가족에 대해 생각한다. 관계와 관계로 이어진 거대한 삶, 그 안에 살고 있는 나를 본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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