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뢰더 전 독일 총리, 위안부 할머니들에게도 관심 가졌던 가슴 따뜻한 지도자
슈뢰더 전 독일 총리, 위안부 할머니들에게도 관심 가졌던 가슴 따뜻한 지도자
  • 김경욱 기자
  • 승인 2018.01.19 17: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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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페이퍼=김경욱 기자]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에 대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1944년 4월7일 독일 니더작센주 모센부르크애서 출생한 슈뢰더 전 총리는 나치병사였던 아버지가 전사한 뒤 세탁부로 일했던 어머니 아래서 4형제와 함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7세부터 도매상점의 견습점원으로 일한 슈뢰더 전 총리는 일하면서 야간학교를 다녔고 대입자격시험을 통과해 명문 괴팅겐대 법과를 이수했다.

1963년 사민당에 가입한 슈뢰더 전 총리는 1978년 사민당 청년조직인 '젊은 사회주의자' 의장에 선출됐다. 한때 도시게릴라 적군파(RAF)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젊은 시절 급진 좌파성향을 보였던 슈뢰더 총리는 80년 연방하원의원, 86년 니더작센주의회 SPD 원내의장, 90년 주총리를 거치면서 이념적 편향에서 탈피해 SPD내 온건파의 지도자로 성장했다.

독일 통일 후 94년 사민당 니더작센주 당수로 정계에 두각을 드러낸 그는 98년 4월 사민당 총리후보로 지명돼 그해 9월 총선에서 40.9%의 득표에 298석의 의석을 확보해 독일 정계의 '거목' 헬무트 콜 전 총리를 물리치고 의회내 다수당으로 집권했다.

또한 총선 직후 의회에서 총리로 선출됐으며, 이후 4년동안 독일 정국을 이끄는 동안 실업자 400만명 시대를 초래한 경제 실정과 서유럽의 우경화 물결 속에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2002년 유럽대홍수 때 위기대처 능력을 보여주면서 유권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줬으며,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반대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1998년부터 7년 동안 총리직을 수행한 슈뢰더는 2005년 11월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남성다운 용모와 화려한 언변으로 '미디어 총리'라고도 불린다. 자신이 총리로 있는 동안 실업자인 동생이 관광 안내원으로 취직한 것이 화제가 될 정도로 주변이 깨끗하다는 평이다.

슈뢰더가 총리로 재직하던 독일은 통일 이후 극심한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전쟁의 상처를 빠른 시간에 극복하고 서유럽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던 서독이었지만 통일 이후 사회, 문화, 경제적 갈등으로 혼란을 맞았다. 당시 유럽의 우경화 추세도 위기였다.

슈뢰더는 통일 독일 내부와 유럽의 혼란 속에서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해 위기를 극복했다. 또한 과거 독일의 과오를 반성하는 모습으로 귀감을 샀다. 2004년 8월 1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나치저항 시민봉기 6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사죄는 국제사회에 강한 공감을 일으켰다.

슈뢰더 전 총리는 2017년 9월 11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민간 지원시설인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을 방문해 할머니들을 만났다. 슈뢰더 전 총리는 일본의 미온적인 과거사 청산과 관련해 "독일은 전쟁범죄에 대해 깊이 반성하는 모습을 국제적으로 분명히 보여줬는데, 일본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고 비판발언을 해왔다.

특히 슈뢰더 전 총리는 '위안부'라는 표현이 잘못됐으며, 피해사실을 보다 정확하게 나타내기 위해 '성노예 피해자'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과거에 대한 반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슈뢰더 전 총리는 빌리 브란트가 닦아온 과거사 반성과 통일의 초석을 거쳐 헬무트 콜이 완성한 통일 독일을 이어받아 유럽의 리더 국가로서의 독일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 그 뒤를 동독 출신 앙헬라 메르켈이 이어나가고 있는 중이다.

슈뢰더 전 총리의 리더십은 통일 이후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혼선과 국제 사회의 혼란 속에서 빛을 발했다는 점에서 북한과 대치하고 있으며, 주변 열강들의 이해관계 속에 놓여있는 대한민국이 관심을 가져야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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