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직장 남녀`의 애틋한 사랑
`같은 직장 남녀`의 애틋한 사랑
  • 북데일리
  • 승인 2005.07.04 0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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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나물인데도 뜻밖에 뿌리가 깊이 뻗어서 제대로 캐지 못하고 잡아 당기다가 결국 뿌리가 끊기는 수가 있는데... 그 때 그 여자와 헤어지고 났을 때, 그런 생각이 들더구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게 이 여자를 사랑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문학과 지성사, 1987년)에 나오는 내용이다. 사랑의 열기는 몹시 뜨거워 데이고도 아픔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생채기를 보며, 사랑의 깊이를 느끼게 된다.

`비명을 찾아서`의 주인공, 서른 아홉의 기노시다 히데요는 회사의 부하 여직원 시마즈 도끼에를 몰래 사랑한다. 사랑하면, 아름다움을 공유하고 싶어지는 법. 히데요는 일상 속에서 수시로 도끼에를 떠올린다.

평범하지만 고즈넉한 주택가를 걸으면서 히데요는 "지금 도끼에와 함께 이 길을 걷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혼자 즐기기엔 아까운 풍경인데..."라고 되뇐다.

겨우 사흘을 동안을 보지 못했는데도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은 배고픔과 같이 생리적 욕구로서 그를 보채고 있었던 것이다.

무난하지만 사랑이 없는 결혼생활. 히데요는 회사에서 도끼에에 대한 설레는 마음에 숨막혀한다.

휴가를 다녀온 그녀에게 히데요는 `고향에서 언제 올라왔느냐`고 묻는다. 이에 도끼에는 `그저께 올라왔다`고 말한다. 이를 듣고 히데요는 매우 섭섭하다.

`일찍 올라왔으면, 전화라도 하지 않고, 난 제 생각을 얼마나 했는데...."

히데요의 짝사랑은 거래처의 외국인 남자 앤더슨이 나타나면서 더욱 안타까워진다. 옆에서 선남선녀의 사랑을 지켜보는 마흔 줄의 남자. 그의 마음은 참아야 하는 이성과 참을 수 없는 감정 사이에서 혼란스럽다.

도끼에 역시 히데요 과장에 대해 호감은 가지고 있다. 히데요는 시를 쓰고 있었고, 도끼에는 그의 감성을 좋아했다. 책 속의 한 장면.

한때, 여성을 사랑했던 추억을 바탕으로 쓴 히데요의 시 `설후`에 대해, 도끼에는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한다.

"무척 애틋한 느낌에 들었고...엄하시기로 소문난 과장님께 이런 면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도끼에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생각했어요. 열 몇 해 전에 헤어진 연인의 얼굴에 자리잡았을 주름살이 부드러워지라고 눈이 내리길 기원하는 마음,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마음이 이 세상에 있을 것 같지 않았어요... ."

바로 이 장면에서 히데요의 명대사가 등장한다.

"조그만 나물인데도 뜻밖에 뿌리가 깊이 뻗어서 제대로 캐지 못하고 잡아 당기다가 결국 뿌리가 끊기는 수가 있었는데... 그 때 그 여자와 헤어지고 났을 때, 그런 생각이 들더구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게 이 여자를 사랑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

히데요의 사랑을 모르는 채, 도끼에와 앤더슨의 만남은 계속된다. 그럴수록 히데요의 마음은 타들어갔다. 말하자면 `질투의 불길이 그의 가슴에서 독한 연기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도끼에는 앤더슨과 결혼 결심을 히데요 과장에게 고백한다. 그런데 히데요는 그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깨닫는다. 알고 보니 도끼에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된 사건이 있었다.

한번은 도끼에가 모임에서, 갑자기 옷을 갈아 입고 나온 적이 있었다. 앤더슨이 나오게 되어 있어, 히데요는 앤더슨 때문에 예쁘게 보이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 하지만 도끼에는 히데요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이 때 히데요의 심정.

<문득 가슴이 막혔다.

`아 날 위한 것이었구나. 그날 도끼에가 입고 나온 것은. 앤더슨에게 곱게 보이려는 것이 아니고... . 날 위해... .`

몸 속 깊은 곳에서 퍼져 올라오는 기쁨으로 그의 마음이 한껏 부풀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이내 절망적 슬픔으로 바뀌어 살을 저리게 했다.

`그런데 난... . 난 그것도 모르고서... . 이젠 늦었지... . 늦었지... .`>

히데요는 다시 한번 가슴을 쳤다.

`도끼에가 사랑한 것은 나였구나. 다른 사람이 아니고 나였구나. 날 사랑했었구나. 그것도 모르고, 바보 같은 놈... . 아, 내가 조금만 덜 어리석었더라도, 내가 조금만 더 용기가 있었더라도... 아, 이젠 늦었지... . 무엇을 하기에 이젠... ."

책의 압권은 히데요가 그 마음을 다음과 같은 시로 표현하는 대목이다. 제목은 `인적`.

다음 세상에서

우리가 다시 만나면

여기서 끊어지는

인연의 실을 찾아

저승의 어느 호젓한 길목에서

문득 마주 서면

내 어리석음이 그 때는

조금은 씻기어 그 때는

이렇게 헤어지지 않으리라

나는 아느니.

아득한 내 가슴은

아느니

어디에고

다음 세상이 없다는 것을.

흔히 `비명을 찾아서`는 `대체 역사` 기법의 소설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일본이 2차 대전 때 패하지 않았고, 따라서 계속 한국을 통치하고 있다는 가정 속에서, 역사의 진실을 찾아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하지만 책은 한 편의 연애소설이라고 할 만큼, 뛰어난 감성 언어를 선보이고 있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달콤하고 맛깔스러운 시가 그 증거다. 특히 청초한 직장여성 도끼에와 감수성 풍부하고 지적인 히데요의 관계는 어느 멜로소설보다 풋풋하고 애절한 사랑을 보여준다. `인적`이란 시는 뒤늦은, 때늦은 사랑을 후회할 때, 딱 어울리는 시가 아닐 수 없다. [북데일리 제성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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