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귀를 열어 세상 소리의 `궁륭`을 보다
시인, 귀를 열어 세상 소리의 `궁륭`을 보다
  • 북데일리
  • 승인 2005.12.01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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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가을 공원. 기다란 의자에 남녀가 나란히 앉아있다. 이제 갓 스물이나 되었을까. 가을볕이 통과한 그네들의 귀때기가 피데기처럼 투명하다. 남자는 여자의 귀를 보고는 오징어가 먹고 싶어졌는지 자리를 일어선다. 여자의 볼을 보고는 금새 쭈쭈바를 물고 온다. 그때마다 희한하게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류인서. 창비. 2005). 평형감각이 맛이 갔나, 위치감각을 상실했나, 소리를 듣지 못하는가. 여자는 남자의 귀를 당겨 무릎에 ?똑畢?. 하늘로 솟은 남자의 귓속이 우물처럼 깊다. 여자는 해부를 하듯이 남자의 귀를 찬찬히 뜯어본다.

"왼쪽 귀가 들리지 않는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그들은 늘 그의 오른쪽에 앉는다/아내 투정도 아이의 까르륵 웃음도/여름날 뻐꾸기 울음소리도 빗소리도 모두/그의 오른쪽 귓바퀴에 앉는다, 소리에 관한 한/세상은 그에게/한바퀴로만 가는 수레다/출구 없는 소리의 갱도/어둠의 내벽이, 그의 들리는 귀와 들리지 않는 귀 사이에//....../세상 온갖 소리를 삼킨 말들이 말들의 그림자가 그의 병 속에 꼭꼭 쟁여져 있다/그것들의 응집된 에너지를 품고 그의 병은/돌종처럼 단단해져간다//한순간, 고요한 폭발음!/소용돌이치며 팽창하는 소리의 우주가 병 속에, 그의 귓속에 있다"(`병甁`)

지하 갱도를 따라 내려가 보니 입구는 좁으나 아래로 갈수록 공간이 넓다. 마치 생강을 저장해두는, 어쩌면 생각을 담아두는 창고처럼 널찍한 지하대피소가 있다. 생각의 침전물이 썩어 가스로 차 있는 그곳은 금방 터질 듯 하다. 호기심이 동한 여자가 그 벽을 두드린다.

"고양이처럼 달랑 의자에 올라앉아 엄지발톱에 톡, 톡, 매니큐어를 바른다/그래, 톡 톡 소리에 귀 기울여보는 것도 괜찮겠다//톡톡, 메밀밭 메밀꽃이 하얗게 귀 트이는 소리/톡톡, 호박잎 위에서 배꼽달팽이 발가락 펴는 소리/톡톡톡, 등푸른 오이가 칼날 위를 뛰어가는 소리/톡톡, 끝여름밤 귀뚜라미망치로 휘어진 철길 두드리는 소리/톡톡, 글자 위를 기어가는 칠점무당벌레 오자탈자 골라내는 소리/톡톡, 소라고둥이 버얼건 폐선 밑바닥에 붙어 심해를 노크하는 소리"(`톡 톡`)

남자의 귀는 소리의 창고다. 그러나 세상 온갖 소리들을 담아두기만 할 뿐 내놓지 않은 남자는 한때 소리의 수전노, 소리의 수구파로 몰려 처형당할 뻔한 안 좋은 추억이 있다.

"시내로 편입된 외곽 도로변 버즘나무는/수구파로 몰려 처형당한 지 오래//......//어설픈 내 갈비뼈 서너 개 부러진 지난겨울/....../나의 늑골이 바로/버즘나무 흉터를 닮아 있음을, 하나/제 상처 쓸어안는 고통, 그 일그러진/표정의 정직함말고는 나의 무엇이 그와 가까운가//....../나 아직껏 귀 열리지 않아/하늘 종루에 가볍게 매달린 무수한 종소리에서/신성의 황홀한 음성 한마디 골라 듣지 못하겠네//그래 누구에게나/저의 이름으로 키우는/베어낼 수 없는 한그루 나무는 있을 것이네"(`플라타너스`)

버짐이 피어오른 상처투성이 나무마저 베지 못하고 품고 있는 사람에게 도시는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의 왼쪽 귀를 후비다 말고 어렸을 적 소읍에서의 비밀의 소리를 풀어놓는다.

"인근 소읍에서 개업한 지 여러 해, 진찰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소녀티 갓 벗은 그녀를 한눈에 알아봤다지 불안이나 죄책감은 숨긴 채 청진기를 들이댄 그의 시선 끝에 아, 새순의 귀여운 젖꼭지가 잡히고 순간 감사와 흥분, 일종의 경외감까지 뒤엉켜 왈칵 눈물이 솟더라고//무엇이, 어떤 신묘한 힘이 그녀 가슴에다 분홍 꽃눈을 다시 돋게 했을까......//......그녀 몸과 그의 마음 대체 어느 부분이 어느 순간에 하나로 만나 그리 힘껏 밀어내고 끄집어당겼을까 돋아 곱다랗게 꽃 피게 했을까"(`몸`)

상처가 아문 자리에 꽃눈이 돋기까지 밀고 당겼던 고통과 환희의 소리가 들려온다. 함몰된 젖꼭지 자리에 핀 꽃은 한그루 쥐똥나무꽃이다. 예고편만 봐도 오짐을 질질 싸는 조루의 도시인에게 건네는 항히스테리 성분의 쥐오줌풀이다.

"쥐똥나무의 꽃은 쥐똥처럼 생기지 않았다//....../열매가 바로 꽃의 원전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아니/....../꽃은 꽃으로서 이미 열매다, 꽃으로서/하나의 완성된 몸, 완결된 별개의 서사다/종 모양의 앙증스런 꽃잎과 꽃받침/더듬이처럼 돋은 수술 따위로/꽃속에 함몰된 열매의 예감을 말하지 마라/이 꽃떨기가 지닌 뿌윰한 반그늘과 고즈넉한 향기는 단순히/세상을 향한 정직한 인사일 뿐/다가올 무엇의 근거가 아니다//......//쥐똥나무꽃은 꿈에도 쥐똥나무의 열매가 아니다"(`쥐똥나무꽃에 대한 변명`)

여자의 계속되는 굴착공사에 남자의 귀가 점점 밝아온다. 위치감각을 회복하니 숨은 별자리를 찾게 되고, 평형감각을 되찾으니 지평을 감싼 따스한 기운을 온몸으로 느낀다.

"왜 가슴보다 먼저 등 쪽이 따스해져오는지, 어떤 은근함이 내 팔 잡아당겨 당신 쪽으로 이끄는지, 쉼표도 마침표도 없는 한 단락 흐린 줄글 같은 당신 투정이 어여뻐 오늘 처음으로, 멀리 당신이 날 보았을지 모른다는 생각 했습니다...... 별들은 불안정한 대기를, 그 떨림의 시공을 통과하고서야 비로소 반짝임을 얻는 생명이라지요 벌써 숨은 별자리라도 찾은 듯한 낯선 두근거림, 어쩌면 당신의 지평선 위로 손 뻗어 밤하늘 뒤지더라도 부디 놀라지는 마시길, 단호한 확신이 아닌 둥그렇게 나를 감싼 다만 어떤 따스함의 기운으로요"(`예감`)

해가 저물자 남자는 북풍을 기다리는 기러기가 되고, 여자는 물의 꽃을 좇는 물오리로 남아 하늘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이때 무지개처럼 남자와 여자를 감싸는 낯익은 소리들!

"남도의 왕대밭 지나다 성당에서 들은 고색창연한 파이프오르간 소리 다시 듣는다 하늘천장을 수직으로 받치고 선 이 묵직한 청동 파이프 다발 속에도 그윽한 울음의 때를 기다리는 따뜻한 공기기둥들이 들앉았는지, 어둠 깊은 바람상자 속에 갇혀 치잣빛으로 익어가는 새벽바다와 댓잎 건반을 두드리다 돌아가는 서느런 손끝의 햇살//잔광의 사원 같은 겨울 기슭 왕대밭에서 메시아여 메시아여, 예언처럼 아득한 당신 목소리의 궁륭을 본다 온몸으로 갇힌다"(`파이프오르간`)

사운거리는 댓잎 사이로 오래된 돌종에서 나오는 은은한 종소리 울려 퍼진다. 남자는 북풍을 타고 올라 기러기자리가 되고, 여자는 물의 소용돌이를 타고 올라 물오리자리가 된다. 새벽 총총한 별 속에서 기러기 우는 소리, 물오리 웃는 소리 그네들이 앉았던 의자를 오래도록 비추고 있다.

[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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