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 지식] 부패관료를 대하는 세종대왕의 자세
[책속의 지식] 부패관료를 대하는 세종대왕의 자세
  • 박세리 기자
  • 승인 2017.06.12 13: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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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용의 힘> 정현천 지음 | 트로이목마

[화이트페이퍼=박세리 기자] 세종대왕 8년 총애하던 최측근 조말생이 비리사건에 연루됐다. 세종대왕은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놀랍게도 계속 병조판서 직을 수행하게 했다. 새 정부 인사를 향한 의견이 분분한 요즘이라 더 눈에 띄는 대목이다. 세종은 왜 이런 결정을 했을까. 반발은 없었을까.

조말생이 연루된 사건은 뇌물사건으로 사형을 받을 형편에 놓일 만큼 컸다. 진행 중인 노비 소송에서 유리하게 판결해달라는 김도련이라는 사람에게 청탁을 받고 대가로 노비 24명을 증여받은 사건이었다.

김도련은 갑부가 된 한 양민의 문서를 달아난 노비로 꾸며 전 재산과 후손 400여 명, 천 명이 넘는 노비를 모두 집어삼킨 터였다. 이 일이 불거지지 않도록 정계 여기저기에 뇌물을 바쳤던 것.

조말생은 이후에도 횡령, 착복이 당시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뇌물 수량의 10배 가까이 된다는 사실이 조사 결과 밝혀져 곳곳에서 사형주장이 이어졌다. 하지만 세종은 끝내 직첩을 빼앗고 유배를 보내는 것으로 결로 지었다. 게다가 2년 후에는 사면했고 그 후 함길도 관찰사에 임명까지 했다. 당시 세종은 이렇게 말했다.

“경들의 말이 법과 의리에 합당하지만 나도 또한 까닭이 있으며, 이는 권도(權道)로 행하는 것이다.” “그대들의 말을 참으로 아름답게 여긴다. 그러나 말생을 보낸 뒤에야 함길도 백성을 구제할 수 있기 때문에 윤허하지 않는다.” (본문 중)

권도(權道)라 함은 목적달성을 위해 임기응변으로 취하는 방법이라는 뜻이다. 당시 함경도 국경은 여진족과 전투와 명나라 영토 문제가 혼재해 있었다. 또 사신이 자주 드나든 만큼 접대에 노련한 자도 필요했다. 세종은 적임자로 조말생을 생각했던 것. 8년 동안 병조판서로 지내며 병무에 관한 일, 외교 문제에도 탁월했기 때문이다. 과연 세종의 기대에 부응했을까.

함길도 관찰사가 된 조말생은 무장 최윤덕과 힘을 합쳐 북방의 ‘4군 6진’을 개척해냈다. <포용의 힘>(트로이목마.2017)이 전하는 내용이다. 이후로도 조말생은 계속 관직에 있으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면 요청을 했지만 세종은 번번이 무시했다. 조말생은 역사에 두고두고 기록되어 뇌물수수의 대표인사로 치욕을 당하게 된 셈이다.

책의 저자는 세종대왕은 사람을 씀에 있어 흠결보다 공적(公的)인 능력 위조로 사람을 쓰고 사적인 허물은 공적을 이뤄 허물을 덮도록 하는 관점에서 처결했다고 말한다. 사적인 부분은 교화하는 것이 중요했다는 맥락에서다.

공과 사의 구별은 중요하다. 인재 등용에 허물을 먼저 보기보다 발휘할 능력에 초점을 둔 것도 길게는 나라와 구성원에게 더 큰 이익이 있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여전히 과제는 남는다. 목적지향적인 인재 등용과 과오를 덮는 문제가 동일 선상에서 논의되어야 하는 문제인가 아닌가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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