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사랑의 불을 지키는 `슬픔의 힘`
작은 사랑의 불을 지키는 `슬픔의 힘`
  • 북데일리
  • 승인 2005.11.28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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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빠바바바바바 빠바 빠바바바 바바~~~~~~~~

(폴모리아 악단의 시그널뮤직 ‘시바의 여왕’이 흐르면, 잠시 후 지하다방 쌍화차같은 목소리가 이어진다)

DJ : 오늘은 종일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거리를 적셨습니다. 길가 플라타너스 잎도 바람에 어디론가 떠나고, 서둘러 집으로 가려는 사람들의 입김이 뜨거운 하루였습니다. 안녕하세요, ‘밤을 익힌 그대에게’ 디제이 김연하입니다. 오늘은 슬픔을 노래한 시인은 많지만, 우리에게 <슬픔의 힘>(문학동네. 2000)을 아름답게 이야기해 줄 김진경 시인과 얘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잠시 전하는 말씀 듣고 계속하겠습니다.

(사이)

DJ : 선생님, 늦은 시간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가을을 아쉬워하는 비가 내렸는데요, 시인이 느끼는 가을은 어떤 것일까요.

“지상에 태어나 있는 것이 슬픔처럼 다가올 때 하늘을 봅니다. 파란 하늘에선 맑은 현들이 무수히 소리를 내고 소리의 끝을 따라가노라면 문득 그대에게 이릅니다.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그대여, 그대의 빈자리가 오늘따라 저리도 환한 것이 내 슬픔의 이유인지요. 환하게 빛나는 그대의 빈자리 위로 나는 내 슬픔의 새떼를 날려 보냅니다. 소란스레 하늘로 퍼져가는 새떼들이 멀리 잠들어 있는 그대를 깨울지도 모르겠습니다.”(‘가을 편지’)

DJ :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는 어느 시인의 싯귀가 떠오르는 데요, 그 슬픔의 새떼가 잠든 사랑을 깨웠습니까.

“서늘해지는 바람에서 그대 소식 듣습니다...... 무사하신지요......//참 많은 세월과 길을 걸어왔습니다. 감꽃 하얗게 핀 울타리를 따라 걷기도 했고, 맨발로 서릿발 위를 걷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 수많은 내가 나일 뿐임을 알 것도 같습니다. 그것이 또한 슬픔임을 알 것도 같습니다. 그렇듯이 당신에 관한 많은 풍문이 당신의 빈자리를 가리키고 있을 뿐임을 알 것도 같습니다...... 저에게 치자꽃 향기를 한 번 더 보내주십시오. 이제 사랑하는 것들 위에 치자꽃 향기 하나 보탠들 어떻겠습니까.”(‘소식’)

DJ : 감꽃 피는 오월에서 서리 내리는 상강까지 오랜 슬픔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치자꽃 같은 사랑의 향기를 맡기라도 한 것입니까.

“치자꽃 향기가 좋아/코를 댔더니/그 큰 꽃송이가 툭 떨어지다/귀한 꽃 다친 게 미안해서/손바닥 모아/꽃송일 감추었더니/합장 인산 줄 알았던가?/보는 이마다/합장한 채 고개를 숙이고 간다/어허, 여기선/치자꽃이 부처일세!”(‘부처’)

DJ : 치자꽃이 부처라면 치자꽃을 받아든 마음 역시 부처의 마음이 아닌가 합니다. 하얀 치자꽃을 보면 함박눈이 떠오르는 데요, 첫눈이 오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길바닥에까지 전을 벌여놓은/마포 돼지껍데기집/빨갛게 달아오른 연탄 화덕을 끼고 앉아/눈을 맞는다/어허 눈이 오네/머리칼 위에 희끗희끗 눈을 얹은 윤가가 큰 눈을 뜬다/대장간에 말굽 갈아끼러 왔다가/눈을 만난 짐말들처럼/술청 안의 사내들이 술렁댄다/푸르륵 푸르륵 김을 뿜어대기도 하고/갈기 위에 얹힌 눈을 털어내기도 하고/나는 화덕에 쇠를 달구는 대장장이처럼/묵묵히 화덕에 고기를 얹어 굽는다/....../저 갈기 푸른 말들에 새 발굽을 달아주어야겠다/오늘 밤 눈 쌓인 재를 넘어 다음 장으로 가기도 하고/딸랑딸랑 말방울을 울리며 사랑하는 이의 집 앞에 멈춰 서기도 하리라” (‘첫눈’)

DJ : (웃음) 부처의 마음을 읽고자 했는데 난데없이 흥청대는 술청이라니요. 어쨌든 한 잔 술에 저까지 얼굴이 불콰해졌습니다. 그 조랑말이 노새라도 만나 사랑이라도 나누었댑디까.

“길을 잃었을 땐/몸이 홀로 알아서 길을 간다/몸이 홀로 익숙한 길들을 찾아가고/몸이 홀로 집을 알아본다//치자꽃 피었던 자리를 알아보고/눈 쌓인 탱자나무 울타리 어디쯤에서의/첫 입맞춤을 알아본다//길을 잃었을 땐 길을 잊어버리고/몸이 펼쳐놓은 풍경을 보아라/울리는 방울 소리 따라/몸이 가는 길을 따라가보아라//때로 오래 잊었던 길목에/발목까지 눈에 빠져 서기도 하고/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앞에 서서/눈위에 방울 소리를 흩뿌리기도 하리라//인적 없는 길을 멀리까지 보기도 하고/눈만 흩부리는 빈집의 침묵을/오래도록 지켜보기도 하여라”(‘눈 오는 밤에 조랑말을 생각함’)

DJ : 치자꽃 얘기를 하다가 조랑말을 타고 너무 멀리 온 느낌입니다. 하여 조랑말은 딸랑대는 방울을 어디에다 걸어두게 됩니까.

“여기 이르기까지 참 오래 꿈꾸었습니다. 나는 지금 또하나의 고샅, 또하나의 불 켜진 집 담 모퉁이에 서 있습니다. 그대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는 걸 이제는 압니다. 이제 그것이 그대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임을 알 것도 같습니다. 오래도록 찾아 헤매다 오래 전에 떠났던 집 앞에 이르러 기진하는 것이 목숨 있는 것들의 일임을 이제 알 것도 같습니다. 이 고샅과 불 켜진 담 모퉁이는 무척 낯이 익습니다. 담 모퉁이에 기진한 은행나무 한 그루 노랗게 물들어 있습니다.”(‘그 낯익은 담 모퉁이 은행나무’)

DJ : 늙은 조랑말은 오랜 여정을 마치고 한 그루 은행나무로 누렇게 생을 마치는 것이군요. 좀 쓸쓸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합니다. 목숨 있는 것들의...

“불길이 세상의 끝까지 태우는 것보다 더 큰 재난은/우리 작은 사랑의 불에서조차/세상을 태우는 불길을 보는 거라고/밤나무 가지 사이에서 누군가 나에게 속삭인다./슬픔이 세상을 태우는 불을 끄지는 못하지만/세상을 태우는 불길로부터/작은 사랑의 불을 지킬 수 있을 거라고/그래서 때로 우리가 은은히 빛날 수도 있을 거라고.”(‘슬픔의 힘’)

DJ : 아, 슬픔에도 그런 힘이 있었네요. 오늘부터 작은 사랑의 불을 지키기 위해서 많이 슬퍼하고 많이 울어야 할 것 같습니다. (웃음, 사이). 시인과 얘기를 나누다보니 추위를 이기는 힘이 솟는 듯 합니다. 끝으로 신청곡, 배호 선배의 ‘황금의 눈’ 띄워 드립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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