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몸에 남아 있는 석기시대 유산?
당신 몸에 남아 있는 석기시대 유산?
  • 이동환 책전문기자
  • 승인 2009.03.09 12: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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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진화했다고? 천만에 우리는 아직도...

 

[북데일리] 수렵채집사회에서 농경사회로의 변화. 1만 년 전에 시작된 이 변화는 우리 선조들의 삶을 근본부터 바꾸어 버렸다. 정착생활을 함으로써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집단의 규모가 커졌다. 또 구석기 시대에 비해서 안정된 식량은 인간이 그동안의 역사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회상을 만들었다.

영국의 고고학자인 고든 차일드(Gordon V. Childe)는 이 변화를 신석기 혁명이라고 불렀으며, 농업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혁명 이후로 우리는 문명을 만들어냈다. 혁명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18세기의 산업혁명은 인간 사회의 사회와 경제 기반을 크게 변모시켰다. 게다가 20세기 이후 벌어진 사회경제의 변화는 지나치게 빨리 진행되고 있다.

모든 유기체는 환경이 바뀌면 이에 적응해야만 존속할 수 있고, 적응을 하지 못하면 도태, 즉 멸종이 이른다. 이것이 다윈이 150년 전에 발간한 그의 책 <종의 기원>에서 말하는 자연선택의 개념이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변화는 우리가 적응하기에는 너무 빠르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몸에 수백 만 년 동안 간직해왔던 유전적인 각인은 혼동을 겪고 있다. 아직 우리 몸은 구석기 시대 인이다. 1만 년은 우리의 유전자가 변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의사이자 저술가인 유르겐 브라터(Jürgen Brater)는 구석기인의 몸으로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그의 책 <정장을 입은 사냥꾼>(지식의숲.2009년)에서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구경 중의 하나가 바로 ‘불구경’이라고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이는 우리 안에 석기인의 정서가 짙게 깔려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구에서 불을 다룰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다. 불을 활용해서 음식을 조리해먹을 수 있었으며, 추위를 이겨냈고, 또 포식자를 물리칠 수도 있었다. 이렇게 불은 석기시대인의 생활에 아주 유용했다. 이는 아직도 우리의 유전자에 그대로 남아있다.

구석기 시대 인들은 사냥이 끝나고 거주지로 돌아오면, 불을 피우고 부족사람들이 둘러않아  잡아온 고기를 구웠으리라. 그들이 지금 먹고 있는 동물을 사냥할 때의 무용담을 이야기하며 남자들은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한껏 자랑했으리라. 불은 이렇듯 원시 공동체에 있어서 사람들을 모으는 매개체였다. 그곳에서 음식을 나누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적 정서를 느꼈고, 부족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야외에서 삼겹살과 같은 고기를 구워먹으며 우리 선조들이 느낄 수 있었던 정서를 느낄 수 있다. 또 밤하늘을 아름다움으로 수놓는 불꽃놀이에도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서양 사람들은 이상적인 집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64퍼센트가 자신의 집에 ‘벽난로’가 있어야 한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사실 벽난로의 불은 우리 선조들이 불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능과는 전혀 다르지만, 현대인들은 벽난로의 기능보다는 다만 가까운 곳에 불이 있다는 데에 만족하고 있는 셈이다. 저자는 활활 타오르는 불을 보고 좋아하는 현대인들을 “잠재적인 방화광”이라고 부르고 있다.

우리의 하품에도 선조의 정신적 유산이 들어있다는 부분은 상당히 흥미롭다. 하품을 하는 이유는 수면 부족이나 산소부족이라는 말을 흔히 한다. 그러나 이는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얘기다. 하품이 전염된다는 말은 오히려 상당한 근거가 있다고 한다. 최근에 이루어진 연구 결과를 보면 하품이 전염되는 원인은 “예부터 이웃의 감정과 행동을 존중”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니 하품에 이런 의미가 있다고 하니 선뜻 긍정하기 힘들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 뇌의 거울 뉴런(mirror neuron)‘이라 불리는 특수한 신경세포 집단이 이런 목적의 임무를 담당한다. 거울 뉴런은 끊임없이 주변사람들의 몸짓과 행동을 분석하여 우리 스스로를 그에게 대입시키고 그들의 감정을 따르게 한다.”(64쪽) 요컨대 우리는 동질감이나 호감을 느끼는 상대가 하는 행동을 따라하는 경향이 있다. 그 사람이 웃으면 따라 웃고, 하품을 하면 하품이 따라 나온다. 정서를 느끼는 우리의 뇌 구조는 우리 선조와 다른 바 없다. 우리의 정서는 아직도 구석기인이다.

사람들에게 어떤 곳에서 살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집에서 내려다보면 앞에는 강이 흐르고 주변에는 작은 나무가 있고, 집 뒤에는 산이 있으면 좋겠다.’ 이런 대답은 우리나라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대답이 아니다. 문화와 인종에 상관이 없이 같은 대답을 한다. 이러한 정서 역시 우리 유전자 안에 강력하게 각인이 되어있는 유산이다. 약간 높은 지역은 전망을 밝기에 적이나 포식자의 활동을 잘 감시할 수 있어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장소다. 또 강에는 우리의 먹이가 되는 어패류가 있고, 마찬가지로 나무 열매도 우리에게 중요한 식량이다. 게다가 높은 나무와 뒷산은 포식자를 피할 수 있는 장소로서 가치를 가지고 있다. 포식자의 위험이 사라진 현대 도시의 생활에서도 우리는 이런 원시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많은 한국인들이 현대식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거실에 화분을 두고, 베란다를 화원처럼 꾸며놓는 행위는 바로 우리 안에 살아있는 석기인의 유전자 때문이다.

‘광장 공포증’은 적으로부터 내 자신이 숨을 곳이 없어서 그대로 노출되기에 위험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기원이 있다고 한다. 또 ‘밀실공포증’은 반대로 자신도 모르게 공격을 받거나 덫에 걸려 빠져나올 수 없을까 두려운 마음에 생기는 증상이라고 한다. 이런 상태는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불안 증후군이지만 그 뿌리는 초원생활로 올라간다.

이제 도시인들에게 초원은 TV에서나 만날 수 있는 장소다. 그러나 도시인들의 유전자는 아직도 초원에서 살고 있다. 우리의 유전자의 변화보다 빠른 환경의 변화가 우리를 힘들게 하고 혼란스럽게 한다. 우리는 아직도 정장을 입은 사냥꾼일 뿐이다.
저자 유르겐 브라터(사진 제공: 지식의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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