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고구려...'책이 준 값진 여행'
아! 고구려...'책이 준 값진 여행'
  • 이동환 책전문기자
  • 승인 2009.02.15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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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유적 통해 웅혼한 기상 한눈에

[북데일리] 고구려라는 단어를 떠 올리면 항상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북방의 드넓은 영토 그리고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던 고구려 군인들의 힘찬 기상이 아쉽다. 비단 21세기에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만이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고구려라는 단어를 잊지 않기 위해 나라 이름조차도 닮으려 했던 고려도 이어진 조선도 북방을 항상 그리워했다.

옛 고구려의 영역 대부분은 현재 중국과 북한이다. 고구려의 모습을 찾아보려고 해도 지금은 중국 지역밖엔 갈 수 없다. 그 조차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옛 고구려의 영화를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폄하하는 자료를 비치한 상태다. 그래도 찾아보고, 또 연구하는 사람들은 많다.

특히나 동북공정 이후로 한반도에서 고구려 역사에 대한 연구는 오히려 더 활발해졌다. 2006년 동북아역사재단은 '동북아와 세계 전체를 불행하게 만들었던 잘못된 역사관과 그로 인해 야기된 문제점을 직시... 올바른 역사이해를 도모,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의 기반을 마련하고 자' 설립됐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설립 이후 많은 책을 출간했으나. 대부분 전문가들의 논문 수준의 책이 주를 이뤘다. 이중 대중을 대상으로 한 책이 눈에 단연 눈에 띄는데, 신간 <고구려를 찾아서>(동북아역사재단.2009년)는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동북아역사재단이 펴낸 <고구려 문명 기행>과 <고구려성 사진자료집>을 저본으로 삼아 내용을 덜어내고 새로운 항목을 추가하여 만든 책이다. 그래서 일반인이 쉽게 읽을 수 있고, 고구려의 유적을 찾아 중국으로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책이다.

“답사는 역사의 현장을 찾아 떠나는 탐구의 여행이자 책에서 배운 지식을 온전히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답사 여행은 글자와 그림으로 이해되던 역사를 살아 숨 쉬는 것으로 바꾸어 주며, 눈과 마음으로 역사를 느낄 수 있게 해줍니다.”

책은 서문을 통해 출간 목적을 말하고 있다. 특히 “문화유적 답사는 책에서만 읽은 반쪽의 역사를 하나로 완성시켜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이라며 각별한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1부는 고구려 최초의 수도였던 환인, 두 번째 수도인 집안과 심양, 단동에 있는 고구려 유적지에 대한 안내다. 2부는 중국의 여러 지역에 걸쳐 있는 고구려 성에 대한 내용이다.

답사의 시작은 고구려의 첫 수도인 환인에서 시작한다. 주몽이 첫 도읍으로 정한 장소로 추정되는 오녀산성은 사진으로만 봐도 천혜의 요새임을 알 수 있다. 동남쪽만 골짜기가 있고, 나머지 방면은 모두 수십 미터에 이르는 절벽이다. 산 정상에는 저수지도 있어, 전시에 성 안에서 장기간 전투에 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왕궁터로 알려진 건물에는 온돌시설도 있다고 하니 중국과는 다른 우리만의 구들 문화도 확인할 수 있다.

광개토왕비

고구려의 도읍은 환인, 집안, 평양 세 곳이었다. 이 중에 집안은 약 400년간 수도역할을 했던 것이다. 고구려 역사가 700년가량이니, 집안 시절이 가장 길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집안시대에 고구려의 영토도 가장 넓었고, 강력한 국가로 자리 매김하던 시기였다.

당연히 유적이 많았다. 그러나 유물이 많이 있는 집안 박물관에 가면 고구려가 마치 중국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았던 중국의 작은 지방정권 수준으로 격하시키고 있다. 동북공정의 흔적이 고구려의 영광을 덮고 있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씁쓸하다.

집안 곳곳에는 고분군(무덤떼)이 있다. 이 중 장군총이 가장 눈길을 끈다. 동양의 피라미드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을 만큼 거대한 크기이다. 광개토대왕의 무덤인지, 아니면 장수왕의 무덤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지만, 고구려 고분 가운데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장군총 인근에는 광대토대왕비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1,600년 전인 414년 장수왕은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비석을 세웠다. 대왕의 업적만큼이나 규모가 큼 비석이다.

이 비석은 집안의 벌판에서 누구의 비석인지도 모른 채, 누워 있다가 19세기 말에 가서야 비석의 주인이 밝혀진다. 그러나 비석을 발견한 이는 일본군 스파이였다. 한반도와 대륙침략을 준비하고 있던 일본군에게 그 비석은 한반도 식민지화를 위해 아주 좋은 먹이감이었다. 이 비석은 지금 지붕과 플라스틱으로 막아 놓았다.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의미겠지만, 왠지 답답해 보인다. 고구려인의 웅대한 기상이 갇혀 있는 느낌이 든다.

고구려라는 나라 이름에서 구려(句麗)는 구루(溝婁)와 같은 말인데, 구루는 성(城)을 뜻하는 고구려 옛말로 고구려의 나라 성격을 그대로 나타내 주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고구려 성은 200개가 넘는다. 중국 내에 대략 170개, 북한 내에 40여개, 남한의 임진강과 한강 유역 일대에 소형 성곽과 보루 수십 개 정도가 남아있다.

이 성들은 대부분 산성이다. 산성은 방어에 유리한 장소였음에 틀림이 없다. 그렇기에 고구려는 오랜 기간 중국의 강력한 군사에 맞서 싸울 수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 사람들이 쌓은 이 성들은 천 년 이상의 오랜 세월이 흘러 많이 허물어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옛 모습을 간직한 곳도 많다. 이는 고구려인들의 축성술이 뛰어 났음을 나타내주는 증거였다.

이 책에는 많은 유적지, 성, 고분 사진이 많이 수록되어 있어 보는 사람들에게 현장감을 살려주고 있다. 그리고 책 곳곳에 팁(Tip)으로 고구려에 대한 의문을 풀어줄 수 있는 작은 이야기 꺼리가 소개되어 있어 책을 읽으면서 의문을 해소시켜준다.

고구려는 지금도 유적지와 유물을 통해서 자신들의 웅혼한 기상과 강력한 국가의 모습을 우리 앞에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갇혀 있는 광개토대왕비의 모습은 한없이 답답해 보인다.

장군총

오녀산성 동벽

사진출처 : 동북아역사재단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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