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외치는 시인...이렇게 정겨울 수가
'표절'외치는 시인...이렇게 정겨울 수가
  • 김대욱 기자
  • 승인 2008.11.19 07: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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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정끝별 '와락', 따뜨함과 넉넉함 배어나와

[북데일리] ‘표절’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정겨울 수 있을까. 시인 정끝별의 네 번째 시집 <와락>(창비. 2008) 이야기다.

시집의 첫 머리를 장식하는 시는 ‘불멸의 표절’이다. 여기서 시인은 이렇게 입을 연다.

“난 이제 바람을 표절할래/ 잘 못 이름 붙여진 뿔새를 표절할래/ 심심해 건들대는 저 장다리꽃을/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이 싱싱한 아침냄새를 표절할래”

이어 그는 줄기차게 표절을 하겠다고 외친다. 앙다문 씨앗의 침묵, 푸른 잎맥의 숨소리, 달리는 화살의 그림자, 당신의 새벽 노래 등이 그녀가 표절하겠다는 대상이다. 급기야 ‘불굴의 표절작가’가 되겠다고 하더니, ‘당신도 나도 하늘도 모르게 전면 표절’을 하겠다고 다짐한다.

이는 시인의 의지를 포개 넣은 표현일 터다. 시인의 눈에 들어오는 모든 현상, 시인의 귀에 들리는 온갖 소리, 시인의 몸과 마음에 안기는 갖가지 심상을 그녀만의 언어로 빚어 시의 만찬을 차리겠다는 포효일 것이다.

시집의 첫 번째 시를 읽은 독자들의 기대에 배반하지 않고 시인은 오색빛깔의 소리를 낸다. 자연에 눈을 두다가, 금세 현실로 눈길을 돌리고, 허허로운 공상에 곁눈질하기도 한다.

이런 시인의 다채로운 관심사를 두고 유종호 문학평론가는 “때로 경쾌하고 때로 당돌하고 때로 우울한 정끝별의 시적 촉수는 관능에서 정치로 혹은 가족사에서 희망적 관측으로 혹은 계절에 대한 반응에서 우주에 대한 명상으로 자유롭게 왕복하며 특유의 묘기를 발휘 한다”고 평했다.

여러 시 중 사회의 낮고 어두운 곳에 대한 시선이 특히 반갑다. 눈앞에 드러난 헛헛한 현실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시인의 마음씨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이급 시각장애 아버지 이온엽(48) 씨가/ 일급 정신지체장애 아들 이기독(20) 군의 허리를/ 끈으로 동여매고 걷는다/ 넘어질 때면 무거운 머리부터 넘어지곤 하는 아들을/ 너펄너펄 걷게 하는 건/ 등 뒤에서 아버지가 붙잡고 걷는 끈이다” (걷는다 중)

“이백원이 웬말이냐 생계대책 보장하라며 해양수산부 앞 도로에 폭락하는 은빛 전어들의 피 좀 봐, 터진 저 노래을 좀 봐,” (일톤 트럭 중)

표제작 ‘와락’의 경우 포옹과 관련한 직접적인 표현이 없어도 제목의 느낌이 절묘하게 다가온다. 언뜻 2%가 부족해 보이는 시라도, 그 시를 읽고 가슴으로 담는 순간 나머지가 채워지는 것이다. 물론 그 나머지를 채우는 건 독자가 시에서 길어내는 감상이고, 이를 끌어내는 건 시인이 고안한 장치일 터다.

“반 평도 채 못되는 네 살갗/ 차라리 빨려들고만 싶던/ 막막한 나락// 영혼에 푸른 불꽃을 불어넣던/ 불후의 입술/ 천번을 내리치던/ 이 생의 벼락// 헐거워지는 너의 팔 안에서/ 너로 가득 찬 나는 텅 빈,// 허공을 키질하는/ 바야흐로 바람 한자락”(와락)

따뜻하고 넉넉함이 배어나오는 시집이다. 이 정도면 부쩍 추워진 요즘, 가슴을 덮여줄 만 하지 않을까.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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