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이런일이]개자식이 된 단군의 자손?
[책속에이런일이]개자식이 된 단군의 자손?
  • 김대욱 기자
  • 승인 2008.10.21 09: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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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犬子熊孫(견자웅손)', 일제시대 창씨개명에 저항한 민족의 울분

“犬子熊孫(견자웅손)”

[북데일리] ‘개자식이 된 단군의 자손’이라는 뜻이다. 이 남우세스런 말이 처음 나온 건 다름 아닌 일제시대다. 대체 어디 쓰인 말일까. 조선인을 비하하기 위한 일제의 욕이었을까?

신간 <한국사 콘서트>(두리미디어. 2008)에 따르면 견자웅손은 조선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민족성을 말살하기 위해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했을 때다. 느닷없이 일본식으로 성을 바꾸라는 요구에 민족은 치를 떨었다. “죽음을 택할지언정 성은 바꾸지 않겠다”며 자결하는 사람도 있었다.

견자웅손은 그 와중에 나왔다. 창씨개명 정책을 조롱하기 위해 망측한 뜻의 성을 신청한 것. 이 뿐만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개똥이나 먹으라’는 뜻의 견분식위(犬糞食衛)라는 성을 내기도 했다.

병하(炳夏)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전농(田農)이란 창씨를 신청했다. 이는 일본어로 ‘덴노 헤이카(천황폐하-天皇陛下)‘와 발음을 같게 해, 창씨개명 정책을 비웃은 사례다. 모두 요즘 네티즌들이 정부 정책을 비꼴 때 사용하는 다양한 댓글에 뒤지지 않는 센스다.

그러나 반항에는 탄압이 따르는 법. 이런 해괴한 창씨를 신청한 사람들은 창씨를 모독했다며 퇴짜를 맞은 것은 물론 경찰에게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

창씨개명과 관련한 이야기를 좀 더 살펴보자. 창씨개명은 친일파의 전유물로 인식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친일파라고 전부 창씨개명을 한 건 아니었다.

정미 7적으로 꼽히는 이병무나 일본 육군 중장을 지냈던 홍사익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물론 이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려 일제에 저항한 건 아니었다. 일제가 의도한 결과였다.

당시 일제는 친일파를 앞세워 창씨개명을 선전했다. 춘원 이광수가 대표적인 예다. 그는 ‘창씨의 동기’라는 글을 써 창씨개명에 앞장섰다.

“내가 향산(香山)이란 씨를 창설하고 광랑(光郞)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고친 동기는 황공하고도 위대하신 천황 폐하의 존명(尊名)과 ‘읽는 법’이 같은 씨명을 가지려고 한데서부터다.”

하지만 일제는 일부 이름난 친일파들에게는 창씨개명을 강요하지 않았다. 창씨개명이 강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려는 목적이었다. 그야말로 교활한 술책이 아닐 수 없다.

책은 선사시대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29개 테마로 나눠 한국사를 훑는다. 눈여겨 볼 부분은 ‘역사 상식 바로잡기’ 코너다. 여기서 저자 백유선은 많은 사람들이 사실로 알고 있는 여러 역사 상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삼족오는 고구려의 상징이었다’, ‘고구려를 건국한 사람은 주몽이다’, ‘황희는 청백리였다’, ‘남대문이란 이름은 일제의 잘못이다’ 등이 과연 맞는지를 따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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