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도 담담했던 박노해의 `아체 공포`
사형도 담담했던 박노해의 `아체 공포`
  • 북데일리
  • 승인 2005.11.16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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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아체의 독립을 둘러싸고 무장투쟁조직 아체자유운동(GAM)과 정부군의 분쟁이 계속되어 온 지 올해로 29년째. 1만5000여명의 사망자를 낸 종족분쟁은 종식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해 말 아체를 삼킨 쓰나미로 16만명의 사상자를 낳자 올 8월 반군과 정부는 평화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반군이 완전 독립요구를 포기하고 무장을 해제하는 대신, 인도네시아 정부는 반군들을 사면해 정치참여를 허용하고 토지와 일자리를 제공 한다’는 약속이 지켜질지는 미지수다.

6년만에 말문을 연 `노동해방` 시인 박노해가 다녀온 곳이 바로 아체다.

<아체는 너무 오래 울고 있다>(느린걸음. 2005)라는 이름으로 펴낸 박노해의 글은 직접 찍은 100여장의 사진과 함께 현장의 공포와 혼란 그리고 인간의 절망을 고스란히 녹여냈다.

그가 겪은 공포는 숨을 멎게 만든다.

“나 때문에 죽음의 위협 앞에 놓인 채 함께 공포에 떨고 있는 통역과 운전기사를 바라보니 더욱 비참했다. 낯선 나라, 인적 없는 낯선 땅에 무릎 꿇려진 채 한 마디 저항도 못하고 살려 달라고, 제발 살려만 달라고, 한 마리 개처럼 떨고 있는 나의 모습, 나의 공포, 그런 내 인간성의 바닥이 너무 비참해서 눈물이 흘렀다. 나의 지난 시절은 저항의 세월이었다. 안기부 지하 밀실의 참혹한 고문 앞에서도, 사형 구형의 순간에도, 무기징역의 암담한 철창 안에서도 단 한 번 무릎 꿇지 않은 나였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비참하게 무릎 꿇고 살려 달라고, 제발 살려만 달라고 소리 없이 애원하고 있는 것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본문 중)

폭력에 저항하며 글과 몸으로 자유를 부르짖었던 박노해가 독립을 원하던 아체의 땅에 도착한 것은 ‘숙명’이었다. 하지만 아체는 그에게 죽음을 떠올릴 만큼의 공포를 체험하게 했다. 박노해는 분쟁으로 얼룩진 역사를 힘겹게 메고 온 이들이 겪어야 했던 쓰나미 피해가 지나간 자리에서 다시 희망을 꿈꿀 수 있을까 고민한다. 책은 오랜 시간 이들을 엄습해왔던 억압과 폭력, 그리고 일그러진 노동구조도 고발한다.

“거대한 쓰레기 하치장만 같은 폐허의 지평선에서 재건의 몸부림이 시작되었다. 망치질을 하던 한 남자가 갑자기 흐억, 하는 탄식을 내뱉으며 한참이나 고개를 떨군 채 맥을 놓고 서 있다... ‘하루 종일 무너진 건물을 두들겨 철근을 캐내어 판다. 이게 바로 내가 살던 집이다....’ 그렇게 모은 고철 1kg을 팔면 700루피아, 우리 돈으로 70원쯤 된다. 성인이 하루 종일 일하면 30kg 정도의 고철을 모을 수 있으니 2,000원 정도를 버는 것이다. 이 철근 장사마저 뱃속 큰 중국 화교들의 독차지다. 기가 막히는 절망의 노동이다”(본문 중)

시를 통해 ‘사람’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사랑을 고백해 온 박노해가 목격해야 했던 아체인의 삶은 ‘절망’ 자체였다. 동시대인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에까지 밀려든 깊은 회의가 그를 괴롭혔다.

박노해가 아니었다면 이토록 자세히 전해질 수 없었던 아체의 고통과 분쟁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엿들을’ 기회라도 허락해 준 진정이 담긴 글과 사진은 ‘경외’라는 단어로 설명될 만한 고통의 흔적이다.

한편 박노해가 이끄는 나눔문화에서는 아체돕기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홈페이지 www.nanum.com

[북데일리 김민영 기자] bookworm@pi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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