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많은 고서들에 대한 이덕무의 느낌과 생각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장정일의 독서일기 조선편’ 이라고 할만하다. 서문을 열고 있는 연암 박지원은 “이덕무는 평생 읽은 책이 2만권에 달했으며 손수 베낀 문자만 수백권이다. 이 모든 글씨가 반듯하고 아무리 바빠도 속자(俗字)를 쓴 것은 한글자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덕무 자신은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가난해서 반꿰의 돈도 저축하지 못하는 주제에 이 세상의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고 어리석고 둔해 한권의 책도 제대로 꿰뚫어보지 못하는 주제에 오랜 세월이 담긴 경전과 이야기책을 다 보려고 하는 구나. 이는 세상물정을 모르는 사람이거나 바보다. 아..이덕무야! 이덕무야!”(본문 중)
자신을 책망하는 목소리는 오히려 독서에 대한 갈증처럼 보인다. 지독히 가난했고, 특별한 재능을 가지지 못했던 그가 평생 손에서 놓을 수 없었던 것이 ‘책’이었다는 사실은 저술가로서, 학자로서 가졌던 그의 ‘열정’이야 말로 남다른 ‘재능’이었음을 말해준다.
이덕무는 ‘책을 보는 바른 방법’에 대해서도 강조한다.
“책을 볼 때는 서문, 범례, 저자, 교정자 그리고 권질이 얼마 만큼이고 목록이 몇인지를 먼저 살펴 그 책의 체제를 구별해야 한다. 대충대충 넘기고서 책을 다 읽었다고 말하면 안 된다. 글을 읽을 때는 시간을 배정한 다음 정한 시간을 넘기면서 읽어도 안 되고 덜 읽어도 안 된다. 나는 어릴 때 하루도 글 읽기를 빼먹은 일이 없다. 아침에 사오십 줄을 배우면 그것을 하루에 오십 번씩 읽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섯 번 차례로 나누고 한차례에 열 번씩 읽었다. 몸이 너무 아플 때가 아니고서는 한번도 어기지 않았다. 그렇게 하니까 공부하는 과정이 여유가 있고 정신이 충전되었다. 육서六書를 제대로 이해 못하면 육경六經은 당연히 알 수가 없다. 먼서 ‘설문해자’를 읽어서 자획, 자의, 자음을 분명히 알고 그다음에 글을 읽어야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글을 읽을 때는 명물名物이나 글 뜻이 어려운 본문을 그때그때 적어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물어보라”(본문 중)
‘독서의 시금석’이 될만한 태도가 심금을 울린다.
책은 박지원이 이덕무가 세상을 떠난 뒤 “그 친구가 저 세상으로 떠난 뒤 나는 이리저리 방황하고 울먹이면서 혹시라도 이덕무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없을까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라고 말했던 이유를 깨닫게 만든다. 이덕무의 근면한 태도는 학문이란 결과만이 아닌 끈기를 잃지 않는 성실한 과정에 그 가치가 존재함을 보여준 감동의 ‘역사적 증언’ 이다.
(사진 = 김천시립도서관 조형물)
[북데일리 김민영 기자] bookworm@pi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