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지나도 썩지않는 `사랑의 詩앗`
천년 지나도 썩지않는 `사랑의 詩앗`
  • 북데일리
  • 승인 2005.11.07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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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 갑니다. 신라의 달밤도 빨간 감처럼 환하게 등불 밝힙니다. 깊은 밤, 옛 우시산국 은현리 적성총 돌무덤, 천년의 잠에서 깨어 별처럼 총총 길을 재촉하는 이 있습니다. 정일근 시인은 지금 `천년의 약속` 공연 차 <경주 남산>(문학동네. 2004)에 가는 길입니다. 천년 고도는 사랑과 평화를 기원하는 사람들의 열기로 가득합니다.

[1부]는 구세대 그룹 `南柯一夢(남가일몽)`이 부르는 ‘꿈속의 길’로 시작합니다.

“꿈 없이 사는 삶이 어디 있으랴만, 내 어린 시절부터 꾸었던 꿈은 시인, 지금도 시인의 꿈을 꾸고 있으니, 무릇 시인이란 꿈꾸는 사람, 경주 남산 돌부처 속으로 들어가 심장에 더운 피를 돌게 하고, 잠든 돌들의 잠도 깨워 천 년 꿈을 노래 부르게 하는 사람”(‘남가일몽의 꿈’)

“마음이 길을 만드네/그리움의 마음 없다면/누가 길을 만들고/그 길 지도 위에 새겨놓으리/보름달 뜨는 저녁/마음의 눈도 함께 떠/경주 남산 냉골 암봉 바윗길 따라/돌 속에 숨은 내 사랑 찾아가노라면/산이 사람들에게 풀어놓은 실타래 같은 길은/달빛 아니라도 환한 길/눈을 감고서도 찾아갈 수 있는 길”(‘길’)

시인이 살포시 감았던 눈을 뜨자, 가을이 무르익은 쪽으로부터 간격이 조금씩 무너지며, 관객들의 가슴은 사랑의 물결로 단풍집니다.

[2부]는 듀엣 “감지와 지귀”가 부르는 ‘사랑의 연가’입니다.

“비단 오백 년 종이 천 년을 증명하듯/우리 한지에 쪽물을 들인 감지는 천 년을 견딘다는데/그 종이 위에 금니은니로 우리 사랑의 詩를 적어 남긴다면/눈 맑은 사람아/그대 천 년 뒤에도 이 사랑 기억할 것인가/....../종이가 천 년을 간다는데/사람의 사랑이 그 세월 견디지 못하랴/돌 속에 잠겨 내 그대 한 천 년 기다리지 못하랴.”(‘감지의 사랑’)

“사랑이란 그리운 사람의 눈 속으로 뜨는 별//이 세상 모은 사랑은 밤하늘의 별이 되어 저마다의 눈물로 반짝이고, 선덕여왕을 사랑한 지귀의 순금 팔찌와 아사달을 그리워한 아사녀의 잃어버린 그림자가 서라벌의 밤하늘에 아름다운 별로 떠오르네, 사람아 경주 남산 돌 속에 숨은 사랑아, 우리 사랑의 작은 별도 하늘 한 귀퉁이 정으로 새겨//나는 그 별을 지키는 첨성대가 되고 싶네”(‘연가’)

첨성대 위로 밤하늘의 수 만개 별들이 쏟아져 내립니다. 시인은 아마데우스처럼 손을 하늘로 쳐들어 별들을 조율하고, 은하수는 안단테로 흘러가고, 별들은 아름다운 소리를 냅니다.

[3부]는 화물연대 산하 신세대스님들로 구성된 인디밴드 `운수납자`가 꾸미는 ‘아름다운 약속’입니다.

“행여,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하지 마라/마음은 산중 운수납자도 열지 못하는/나무서랍 속의 낡은 비밀서류일 뿐이려니/경주 남산 수리봉에 올라 하늘을 보라/제 성좌로 찾아와 빛나는 밤하늘의 별들과/보름이면 어김없이 자신의 몸을 굴리며/제자리로 돌아오는 둥근 달/약속하지 않아도 찾아오는 사랑 있으니/기다리지 않아도 돌아오는 약속이 있으니”(‘사랑의 약속’)

“경주 남산 돌 속에 숨은 사랑을 찾아 헤매는 내게도 그런 약속이 있습니다. 오십육억 칠천만년, 멀고 먼 윤회의 바다 다 건너서라도 그리운 그대가 내 이름 부른다면 사랑의 원을 그리며 이 세상으로 돌아오는 아름다운 약속, 어느 별 어느 하늘에서 그대가 내 이름 부른다면 불타는 혜성이 되어 돌아오는 약속이 있습니다. 내 생에 오직 한 사람의 인연인 그대를 찾아 욕계육천마다 둥근 화엄의 원을 그리며,”(‘약속, 아름다운’)

스님들이 떠난 자리에 둥근 화엄의 원이 무대에 머물다 하늘로 오르더니, 그만 보름달이 되어 따스하게 비춥니다. 와, 하는 함성소리에 잠든 돌이 움찔합니다.

[4부]는 시인이 직접 연주하고 노래하는 ‘다시, 기다림의 그 길에서’입니다.

“그대 언제쯤 서라벌에서 부는 바람 편에 안부와주소가 적힌 길고 긴 사랑의 편지 보내주시겠습니까. 그 편지 받으면 비파암 진신 석가께서 낮잠에 드는 봄날 오후, 바위 위에 벗어둔 가사 슬그머니 훔쳐 입고 그대 만나러 저잣거리로 내려가겠습니다. 내려가 그리운 그대 노래 한 소절만 들을 수 있다면 다시 돌 속에 잠겨 흘러갈 오랜 잠이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 노래 허리에 띠로 감고 앉아 또 한 천 년 무작정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노래’)

“분명 한 번도 걸어간 적이 없었지만/언젠가 걸어간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그런 길이 있듯/경주 남산 길이 그렇다//......//나는 천 년 전에도 이 길을 걸어가던/신라의 사람이었으리/마음의 길을 찾아 걸어가던/경주 남산의 운수납자였으리//언제나 마음이 먼저 길을 열고/발길보다 앞장서서 산을 오르는 길을 따라/갈림길 위에서도 한 점 미혹이 없는 산길을 따라/다시 천 년이 흘러간 뒤에도 나는/즐거이 이 길을 걸어가려니”(‘길’)

공연이 끝났는데도 관객들은 자리를 뜰 줄 모릅니다. 보름달은 남산 수리봉에 닻을 내린 채 점점 더 부풀어 오르고, 별들은 소낙비처럼 사람들의 머리위로 쏟아져 내립니다.

시인은 다시 은현리로 돌아가는 길에서 흐뭇한 마음으로 사운거립니다. ‘올해도 황금풍년이 찾아온 은현리 들판은 여전히 태평성대다. 농부 한 사람 느릿느릿 논두렁길을 걸어가며 활짝 웃는다. 그 얼굴이 평화다.’

방사능으로 썩게 될 땅에, 천년이 지나도 썩지 않을 ‘사랑의 詩앗’ 뿌리는 사람, 거기 있습니다.

(사진 = 경주시청 제공) [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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