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색의 화려함 뒤에 감춰진 갈색의 슬픔
원색의 화려함 뒤에 감춰진 갈색의 슬픔
  • 북데일리
  • 승인 2008.06.03 09: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북데일리]콜럼버스의 항해로 촉발된 지리상의 발견 후, 세계 역사는 단 한 줄로 요약되었다. ‘북방세력에 의한 남방침탈’이 곧 세계사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대륙의 정복자들은 앞 다투어 범선의 돛을 올렸고 희망봉을 돌았다. 자신의 터전에서 평화롭던 원주민들은 졸지에 식민의 노예가 되었고 그들의 삶과 문화는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아프리카가 그랬고 아시아가 그랬다. 아메리카의 밀림에도 정복자들의 잔인한 살육으로 인한 인디오들의 피가 강물이 되어 흘렀다.

라틴 아메리카, 우리가 흔히 중남미라 부르는 그 땅에는 지금도 식민의 상처와 이민의 애환이 짙게 묻어난다. 근대의 디아스포라들이 정처 없는 마음을 가눌 데 없어 슬피 우는 땅, 아픈 역사의 증거가 혼혈의 핏줄로 이어져 내려오는 터전, 이식된 근대화의 채찍에 살을 찢기며 살았던 민중의 한이 혁명으로 불타오르는 뜨거운 고장, 라틴 아메리카.

이방인이 오히려 낯설지 않은 그 이방인의 땅에 한 사내가 여행을 한다. 아니 그들의 삶 속을 비집고 들어선다. 같이 겪은 이산의 고통을 핑계 삼아, 함께 간직한 피식민의 역사를 둘러대며, 많이 닮은 선조들의 문화와 피부색을 구실삼아 화가이자 작가인 김병종은 그렇게 라틴 아메리카와 그 안의 사람들을 만난다. 닮았으나 또한 다른 한 이방인의 눈에 비친 그들의 표정과 그 삶의 속살들을 화가는 붓으로 펜으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서울대 미대교수이기도 한 김병종은 <라틴화첩기행>(램덤하우스. 2008)에서 자신이 걸었던 라틴아메리카의 땅을 추억하고 그 땅에서 살았던 많은 위대한 인생들을 이야기 한다. 또한 그 슬픈 식민지의 삶 속에서 오히려 찬란하게 피어난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와 음악과 예술을 소개한다.

역사는 우울했을지언정 삶은 결단코 우울하지 않은 위대한 라틴의 품성을 들려주는 그의 목소리는 흑인영가처럼 나직하면서도 쿠반 재즈의 북소리처럼 흥이 난다. 탱고의 격렬한 몸짓처럼 살아 펄떡인다.

카리브해의 흑진주, 쿠바! 하고도 아바나. 치명적 중독성을 가진 도시, 불온한 여인처럼 마초 이미지의 사내들을 향해 손짓하는 곳. 살사 리듬과 혁명의 구호가 타악기와 랩처럼 공존하는 땅. 가난하지만 결코 남루하지 않은 나라, 삶은 우울할지언정 표정은 결코 우울하지 않은 사람들. 사르트르가 “20세기 가장 성숙한 인간”이라 평했던 체 게바라가 여전히 살아 숨 쉬는 혁명의 땅. 그 쿠바의 호세마르티 공항에 내리면서 김병종의 라틴 여행은 시작된다.

아! 카리브. 아하! 음악! 이것이 쿠바의 맨얼굴, 민낯이다. 이제는 세계적인 쿠반 재즈의 대명사가 된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이 단박에 동양의 이방인을 사로잡는다. 황홀경에 취하게 한다. 카리브의 청옥빛 바다만큼이나 청량하게, 불어오는 해풍만큼이나 끈적끈적하게, 우울과 활력이 공존하는 그들 도시의 아이러니를 타악기 리듬에 맞춘다. 그들의 허기진 영혼과 삶의 애환은 달콤한 선율로 흐르고 춤을 추는 댄서의 몸짓은 관능적이되 우아함을 잃지 않는다.

“아무래도 저 리듬이다. 광장이나 골목할 것 없이 환청처럼 밀려왔다 사라지곤 하는 저 타악기 마라카스의 리듬. 귀와 피부 속으로 스멀스멀 스며들어와 핏줄을 타고 흐르면서 단숨에 아드레날린이라도 주사한 듯 심장박동을 팽팽하게 당겨 일으키는 저 북소리. 아련하면서도 저릿한 그 자장 속으로 들어서면 그 누구라도 ‘현실의 작은 결핍쯤이야, 존재란 이토록 눈부시고 아름답고 달콤한 것이거늘’이라며 가슴속에서 간지럼처럼 퍼져오는 행복감과 충만감에 푹 잠겨버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 본문

쿠바에서 혁명이란 자본주의에서의 사랑 같은 것이다. ‘혁명’과 쿠바인의 ‘일상’은 각자를 상관하지 않은 채 자유롭게 돌아간다. 쿠바에서의 삶은 소설보다 훨씬 소설적이다. 때문에 미국인이면서도 가장 쿠바적이었던 헤밍웨이는 ‘암보스 문도스’ 호텔에서 필생의 역작들을 쓸 수 있었으리라.

‘카페 프로디타’에서 차를 마시며 그는 영락없는 쿠바인으로 살았고 코히마르 바닷가에서 필생의 지기 그레고리오 푸엔테스(‘노인과 바다’의 실제 주인공)와 어울렸다. 그토록 쿠바를 사랑했기 때문이었을까. 쿠바 혁명이 성공한 후,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돌아간 헤밍웨이는 그 이듬해(1961.7.2) 권총의 방아쇠를 당겨 마초 흉내로 점철된 자신의 인생을 마감한다.

쿠바하면 떠오르는 또 한명의 위대한 패배자 체 게바라. 의대 졸업반이었던 이 열혈의 청년은 모터사이클에 몸을 실고, 조국 아르헨티나의 팜파스를 지나고 안데스를 넘어 잉카제국의 전설과 만난다. 볼리비아의 밀림과 아마존의 정글에서는 선조들이 흘린 핏자국을 보고 제국주의자들의 침탈에 신음하고 죽어가는 민중들의 처절한 통곡소리를 듣는다.

그가 본 라틴의 참상, 그는 이제 청진기 대신 총을 들어야 했고 환자의 심장소리 대신 땅의 울음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하얀 가운을 벗어던지고 푸른 군복을 입고 베레모를 쓴다.

그는 뛰어난 공산주의 이론가였으며 자애로운 선생님이었다. 놀라울 만큼의 직관력을 가진 화가였고 종이와 펜을 놓지 않는 훌륭한 문필가였다. 그러나 제국주의자들에게 만큼은 누구보다 냉혹한 전사였으며 결코 타협하지 않는 냉정한 승부사였다.

그럼에도 그가 우리에게 풍기는 인상은 절대 비정하지 않다. 그것은 바로 그가 평생을 잃지 않고 간직했던 인간에 대한 따스한 시선 때문이다. 인간해방에 대한 확고한 신조 때문이다.

“이방인의 눈에 비친 음영 짙은 서늘한 눈매에 시가를 꼬나문 모습은 낭만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가 입은 군복과 부여잡은 총마저 한사코 그 낭만을 부추기는 소도구로만 보일 뿐이니 어찌할꼬. 그러나 진정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후벼 파게 만드는 것은……. 약한 곳, 눌린 자를 바라보는 그의 따스한 시선 때문이다.” - 본문

이 우수에 찬 쿠바의 연인, 아니 세기의 연인은 볼리비아의 산악에서 스러졌다. 여전히 못 다 이룬 인간해방의 그 길이 안타까워, 지금도 억압받고 차별 당하는 라틴의 동포들이 불쌍하여 눈도 감지 못한 채 이승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꿈꾸었던 착취 없는 세상에 대한 열망, 평등에 대한 불타는 염원, 기만적 폭력에는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는 불굴의 기개는 지금도 살아 있다. 혁명이란 이름으로, 혁명에 대한 강고한 신념으로.

체 게바라의 정신이 살아 숨 쉬는 혁명의 광장에는 또 한 명의 위대한 선구자 호세 마르티의 흉상이 있다. 쿠바의 호치민이자 쿠바인의 노래 ‘관타나메라’의 노랫말을 쓴 국부의 얼굴이다. 자각 없이 숙명과 굴종으로 받아들여지던 외세와 식민 상태에 대한 최초의, 그리고 가장 본격적인 저항은 나약한 문인이자 교육자였던 호세 마르티로부터 비롯되었다.

그에게 쿠바는 절대 강대국의 종속국이 되어서는 안 되었고 계급과 소유, 인종 간의 차별은 단호히 거부해야할 인간에 대한 예의였다.

아바나를 더욱 아바나답게 하는 밤의 트로피카나쇼와 석양의 말레콘은 아바나의 서로 다른 두 얼굴이다. 그 곳을 지나면 저자의 발길은 멕시코에 닿는다. 벽은 단절이며 너와 나 사이에 가로 놓인 금이라는 고정관념을 일거에 허물어버린 색채의 마술사 디에고 리베라의 조국. 벽으로 하여금 살아 꿈틀거리며 생을 긍정하게 만든 남자, 디에고 리베라. 그의 이름처럼 너무나 자유분방하여 프리다 칼로의 평생의 고통이었던 이 위대한 예술가.

막달레나 카르멘 프리다 칼로, ‘평화’를 뜻하는 프리다로 살지 못하고, 자기애 강하고 자유분방하며 타고난 유혹자인, 그리고 그 성격 때문에 결국 파괴되고 마는 카르멘이라는 운명의 패를 집어 들어야 했던 고통의 메신저 프리다 칼로의 푸른색이 강렬한 햇빛에 부서져 먼지처럼 사라지는 땅, 멕시코 그리고 멕시코시티. 화가는 칼로의 푸른색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블루, 우리는 막연히 푸른색에서 희망의 기미를 읽어내지만 본디 푸른색 깊숙한 곳에는 우울이 출렁이고 있다.”

광기와 고통으로 얼룩진 여사제의 제단을 지나면 바로 앞에는 부정과 혼혈의 씨앗으로 잉태된 메스티조의 슬픈 운명이 마주한다. 코르테스에 의해 저질러진 짐승의 나날들과 자기분열의 역사는 챙 넓은 모자 솜브레로로도 가려질 수 없는 것이다.

일찍이 그 고통의 땅에서 혁명의 빛과 그림자를, 아니 빛보다는 그 그림자를 정확하게 집어내 햇빛 아래 드러낸 지식인이 있다. 카를로스 푸엔테스, 그에 의해 혁명은 다시 혁명해야할 중요한 시대의 소명이 된다.

화가는 지치고 몸은 피로하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을 향한 끝없는 열망은 잠시도 화가를 쉬게 하지 않는다. 그의 발걸음은 아르헨티나로 향하고 에비타의 폭죽 같은 삶은 그를 전설의 시공간으로 이끈다. ‘울지마오, 아르헨티나여’ 마돈나의 노랫소리보다 오히려 그녀의 관능적인 몸짓으로 살아나는 에비타의 아르헨티나여! 물과 공기의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20세기 환상문학의 거장 보르헤스의 시를 통해 살아 있는 듯이 꿈틀댄다.

왕가위의 화면(해피투게더) 속에서는 몽환적인 그리움의 장소로, 탱고의 신이라 불러도 족한 피아졸라의 반도네온 선율 속에서는 지쳐 쓰러질 때까지 춤추는 자들의 도시, 그래서 보르헤스의 환상과 현실이 공존하는 곳, 부에노스아이레스. 이태리 이민자의 그리움과 정처 없는 이산자의 아픔이 관능의 몸짓과 열정의 땀방울로 배어나는 나라 아르헨티나는 죽어갈지언정 결코 잠들지 못한다.

“실수로 스텝이 엉기면 그게 바로 탱고라오. 실수로 넘어지면, 그게 삶이라오.(영화 ‘여인의 향기’ 중에서)

“탱고는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시작한다. 눈빛 안에 유혹과 관능, 격정과 한숨, 슬픔과 원망, 이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뜨겁게 얽혀들었다가 싸늘하게 흩어지는 그 눈빛 속에 인생이 녹아들어 있다. 눈물과 이별, 고통과 슬픔마저도 향연이 된다.”

탱고의 격정적인 숨결이 식기도 전에 저자는 어느새 브라질의 삼바드로모 거리에 있다. 죽기를 각오한 광란의 카니발로 일 년 중 딱 사흘 동안만 필요한 미친자들의 거리.

비루한 삶을 바꿀 수 없는 사람들이 딱 사흘 동안 꾸는 황홀한 꿈이며 환상인 리오 카니발. 카니발 기간 동안 그들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논다, 그 광란의 축제가 끝나면 그들은 다시 남루한 일상을 버티며 산다. 그날의 환희와 열정을 반추하며…….

1월의 강 리우데자네이루와 그 물굽이를 지켜보며 서있는 산정의 코르코바도 예수상, ‘악마의 목구멍’이란 섬뜩한 이름을 가진 이구아수의 그 거대한 물기둥, 안데스의 만년설이 사시사철 하얀 하늘을 보여주는 칠레의 산티아고, 그리고 ‘위대’를 넘어선 불과 얼음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 요요마의 현소리가 지금도 생생한 잉카제국의 옛 수도 ‘쿠스코’와 그 돌담의 불가사의, 이승과 저승의 경계 같이 감추어진 산정의 분지에 세워진 천국으로 가는 입구 맞추피추…….

이 지면은 라틴의 사람과 역사, 그 고장의 맨살을 다 보여주기에는 너무나 좁다. 다행인 것은 화가의 붓질로 우리는 라틴 아메리카의 인상을 살펴 볼 수 있고 그들의 일상을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원색의 화려함 뒤에 감추어진 갈색의 고통은 선인장의 가시처럼 내 눈을 찌르고 내 가슴에 박힌다. 그러나 아마존의 거대한 밀림을 흐르는 강물처럼, 드넓은 팜파스의 싱그러운 초원을 스쳐가는 바람처럼 도도한 역사는 오늘도 이어진다. 그 안의 사람들과 그들의 일상은 또한 계속된다. 헤밍웨이의 노인은 들려준다.

“인간은 패배하지 않는다. 멸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패배하지 않는다.”(<노인과 바다> 중)

[임흥재 시민기자 epogue21@naver.com]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